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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4 18:47 수정 : 2005.02.04 18:47

서구 문화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은 스스로 동아시아의 제국이 되려는 야심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 서구 문화를 전파하는 가장 가깝고 친숙한 창이었다. 한국이 유교적 전통을 내세워 서양문물과 일본을 배척하다가 무력에 의해 일본에 종속돼 가던 19세기 말에, 유교의 본산인 중국은 어떠했을까. ‘근대 중국 지식인의 일본 유학’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청나라 봉건 왕조를 개혁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의 희망과 수치심, 자기번민과 결의를 다룬다.

아편전쟁을 치르며 서양 함대의 위력에 놀란 청조는 18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 청년들을 유학보내 병선 조종과 조선에 관련된 연수만을 받게 했다. 근대식 정치제도를 배우는 건 청조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 유학생들은 귀국해 청일전쟁에 동원돼 바다에 수장돼 갔다. 청조를 다시 유혹한 건 일본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을 회유할 겸, 일본은 1898년 ‘지나보전’을 모토로 내세운 동아동문회를 만들어 중국인의 일본 유학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인들의 일본 유학 현장에선 역설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주일 중국 공사는 중국인 유학생들의 동태를 보고하면서 “민주라는 바람에 물들어 결국은 혁명을 주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담은 문서를 베이징 외무부에 보냈다. 일본인 교수는 “공맹사상을 받들고 혁명은 자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중국인 학생들은 거기 맞서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가노 지고로와 양두 사이에 벌어진 이 ‘지나교육 대논쟁’은 중국 본토로 흘러들어가 훗날 마오쩌둥의 스승이 되는 양창지를 흥분시켰다. 일본을 의심하면서도 1903년 일본으로 유학간 양창지처럼, 중국 지식인들은 경계와 각오가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일본을 찾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본은 쑨원의 혁명파, 캉유웨이의 유신파, 량치차오의 입헌군주파 등 중국 근대의 혁신세력들의 집결지가 되면서 ‘양산박’으로 불렸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리다자오, 리류루, 저우언라이 등도 일본에서 〈자본론〉과 가와카미 하지메의 책을 읽으며 공산주의를 익혔다.

책 제목은 중국 공산당의 원로 혁명가 우위장이 1903년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쓴 시에서 따왔다. 봉건구습과 외침으로 망해가는 중국을 구할 신산의 선약을 찾아 동쪽으로 간 이 청년들은 ‘전족’과 ‘변발’의 풍습으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전족은 ‘서양 여성은 몸을 희생하여(허리를 졸라서) 아름답게 보이려 한다’, ‘중국 여성은 발을 희생하여 추하게 보이게 한다’는 미추논쟁까지 낳으며 전족 폐지령을 낳게 했다.

베이징일본학연구센터 주임교수를 지낸 옌안성(68)이 쓴 이 책은 쉽고 간결한 문체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념 지형도를 그려준다. 100년이 지나 다시 중국과 일본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지금 시점에서 흥미로운 시사점이 많다.

▲ 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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