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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4 19:01 수정 : 2005.02.04 19:01

이야기로 읽는 한중문화교류사 \

공녀의 눈물·북학파의 호기심…두나라의 만남 ‘오롯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교류는 거의 중국 한 나라와만 이뤄졌다. 주로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는 교류 관계였지만 주도적 역할을 하며 중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언제나 있었다. 또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교류역을 맡았던 이들도 있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김성남씨의 책 <이야기로 읽는 한중문화교류사>는 두 나라 사이에서 서로를 잇는 다리가 되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와 중국을 이어주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은 중국의 서울 베이징을 대표하는 전통문화거리 ‘유리창’이다. 한국말로 흥정하는 소리를 어렵잖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곳이지만 1~2세기 전에는 오히려 더욱 많은 조선사람들이 이 곳을 누볐다. 청나라를 찾는 조선 사신들, 그리고 조선 학자들은 예외없이 이곳에 들러 책을 사면서 정보와 학문을 교류했다.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책들은 바로 이 곳 유리창에서 온 것들이었고,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나간 책들이 모이는 곳도 유리창이었다.

고염무와 옹방강같은 중국 학자들, 양주팔괴의 한 명이자 화가인 라빙 등이 활동하던 유리창을 찾아간 이들 가운데 홍대용과 박제가, 이덕무와 유득공이 있었다. 그들은 사신으로서 조선이 필요로하는 서적을 골라내는 한편 청나라에 대한 정보를 베끼기도 하면서 유리창 곳곳을 바삐 돌아다녔다. 한편 학자로서도 그들은 유리창에서 중국학자들과 우정을 쌓고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학문세계의 고아한 문자향이 두 나라 학자들을 국적을 넘어 진정한 친구로 이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의 교류는 그 이전 원대에 비해서는 훨씬 행복한 편이었다. 원제국은 조선을 복속시키지는 않았지만 임금에게 ‘충’자를 붙여 주종관계를 각인시켰고, 왕족을 인질처럼 중국땅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 여성들과 환관을 강제로 끌어가 왕실 인력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원나라에 끌려간 공녀들 가운데 원나라 황실을 쥐락펴락한 기 황후가 나왔고, 원에 맞서는 개혁정치를 펼치다 좌절한 충선왕이 나왔다. 지은이는 이들이야말로 운명은 가혹했지만 그 운명속에서도 모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땅에서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들이었다고 역설한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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