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위즈덤하우스(2019) ‘벽장 안의 해골’이라는 영어 숙어는 사람이 살면서 숨겨 놓는 음험한 비밀을 가리킨다. 모두가 살면서 이런 비밀을 갖게 되지만,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인 경우가 있다. 바로 <루거 총을 든 할머니>의 베르트 가비뇰의 경우이다. 프랑스 오베르뉴에 사는 102살의 베르트 할머니가 체포된다. 수배 중인 젊은 커플 로이와 기메트를 돕기 위해 옆집 남자의 차를 훔치고, 그 와중에 그 남자의 등을 총으로 쏴버렸다는 혐의이다. 게다가 경찰들에게도 총을 쐈다. 베르트는 과연 그 총을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수사를 맡은 벤투라 반장은 총의 출처를 추궁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루거 총은 2차 대전 당시 베르트를 공격한 나치 군인에게서 빼앗은 것이며, 그는 지금 베르트의 지하실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놀랄 일은 그뿐이 아니다. 베르트의 지하실을 파헤친 경찰들은 더욱 충격적인 상황에 맞닥뜨린다. 지하실의 해골은 단 한 구가 아니고,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베르트의 ‘벽장 안의 해골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베르트는 경찰들을 앞에 두고 셰에라자드처럼 긴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베르트가 구하려고 하는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역사상 최고령의 연쇄살인범 대열에 낄 베르트 가비뇰의 증언은 20세기를 살아온 여성의 역사이다. 할머니의 유산인 독한 술과 강단을 물려받은 베르트는 평생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다. 그의 인생을 쥐고 흔들어놓으려 했던 남자들은 상인, 식당 주인, 댄서, 화가 등등 직업도 기질도 달랐지만, 한편으로는 다 똑같이 베르트를 억압하려고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결혼이 한쪽 성을 착취하기 위한 제도인 사회에서는 파트너를 바꾼다고 해서 억압과 통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결혼을 도박이라고 한다. 베르트도 어느 시점까지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다시 운을 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좋은 운명으로 풀려나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트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행운을 기다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지금 102살에도 형사들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이 할머니는 “도박사보다는 킬러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약자를 향한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벽장 속에 해골을 차곡차곡 쌓으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온 베르트는 ‘생존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생존은 행운의 결과가 아니고, 피해자들이 폭력과 적극적으로 싸워 이뤄낸 성취이기 때문이다. 베르트는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지키며 한 세기를 살아냈고, 마지막까지 타인을 구한다. 현실에서는 마음속으로만 벽장 안 해골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짜릿한 스릴러가 없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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