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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6 06:01 수정 : 2019.09.06 19:41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
비에른 베르예 지음, 홍한결 옮김/흐름출판·2만5000원

1970~80년대 한국에서도 우표 수집 열풍이 거셌다. 우표는 휘귀본일수록 값어치가 나간다. 우표 발행국이 사라지고 없다면 더할 나위 없다. 프랑스의 우표 수집가가 쓴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은 말 그대로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나라들이 발행한 우표를 통해 격변의 근대 세계사를 톺아보는 책이다.

국내에선 1990년대부터 우표에 관한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론 우표로 본 한국 현대사와 세계사, 인물, 문화유산, 민속, 악기 등 주제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사라진 나라들’ 이야기는 처음이다. 19세기 초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짧게 명멸한 나라들과 당대의 국제 정세를 우표라는 작은 종잇조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쏠쏠하고도 쓸쓸하다. 그 대다수가 독자적 주권을 갖춘 국민국가가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이거나 식민지 속령, 기껏해야 도시국가 정도였으며, 제국주의 패권국 또는 주변 국가에 흡수돼 짧은 역사를 마감했기 때문이다.

1885년 밴디먼스랜드 발행.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 흐름출판 제공
책에 나오는 50개 나라는 대부분 이름조차 생소하다. 그러나 “우표는 그 나라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구체적 물증이자 믿을 만한 사료”다. 지은이는 “이 책을 잠자리에서 읽는 동화 모음 정도로 봐주시라”고 했지만, 내용은 실제 사료와 지은이의 상상력이 결합한 역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주가 된 ‘밴디먼스랜드’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동화 같은 소인국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는 1803년 영국이 정복한 자치령 식민지이자 “우표도 덜덜 떠는 죄수 유형지”였다.

독일 북부의 작은 섬 헬리골랜드는 ‘성스러운 땅’이란 뜻의 고요한 휴양지였으나 2차 대전 막바지에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모로코 남단의 주비곶은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우편비행사로 근무했던 스페인 식민지였다. 아시아 대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목민의 나라 탄누투바는 독특한 언어와 우표, 두 음을 동시에 내는 목노래 창법에 반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으나 짧은 자치공화국 시절을 끝으로 1944년 소련에 합병되고 말았다.

1869년 오렌지 자유국 발행. 오렌지나무가 그려진 평범한 도안이다. 흐름출판 제공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단에 정착한 백인 개신교도들이 “유색인과 백인 주민 사이에 어떠한 평등도 허용치 않았”던 오렌지 자유국, 횡령 혐의로 도망치던 프랑스 사업가가 인도차이나 오지의 부족장들을 꼬드겨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던 브엉꾸옥 써당, 시와 여성을 사랑한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원조 단눈치오가 야심을 키웠던 피우메도 한때는 정부와 행정망을 갖추고 우표를 발행했다.

나라 구실을 하려면 우표 정도는 발행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정권이 세계 역사상 1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표에 사용된 도안은 그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친다. “획일적·남성적 군주제 문화에 대한 위풍당당한 묘사, 각종 군사 정복과 온갖 국가적 영웅들을 기념하는 이미지들로 수두룩”하다. 행동생태학에서 말하는 ‘과시 행위’이자 “일종의 정치적 선전”인 셈이다.

1931년 파나마운하지대 발행. 흐름출판 제공
지은이는 나라마다 소인이 찍힌 우표 사진과 지도를 싣고, 존속 시기와 인구도 일일이 밝혔다. 책은 1840년부터 1975년까지를 6개 구간으로 나눈 연대기 순으로 짜였다. 하지만, 어디를 펼쳐도 재밌게 술술 읽힐 뿐 아니라, 잘 몰랐던 세계사의 뒷풍경이 승자가 쓴 역사의 빈틈에 퍼즐처럼 맞춰지는 걸 확인하는 짜릿함이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1921년 단치히 발행. 한자동맹의 코그 범선. 흐름출판 제공

1934년 트리폴리타니아 발행. 항공기 경주대회 ‘오아시스 서킷’과 트리폴리 무역박람회 기념 우표. 흐름출판 제공

1934년 탄누투바 발행. 유목생활을 하는 낙타몰이꾼. 흐름출판 제공

1968년 비아프라 발행. 독립 1주년 기념우표. 흐름출판 제공

1920년 피우메 발행. 단눈치오의 피우메 진군 1주년 기념우표. 흐름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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