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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6 06:01 수정 : 2019.09.06 19:44

은희경 장편 ‘빛의 과거’
70년대 여대 기숙사 배경
청춘의 혼란과 모색 그려

소설 속 소설 장치 통해
기억과 재현의 복잡성 다뤄
“주인공에 내 모습 들어있다”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문학과지성사·1만4000원

은희경의 신작 장편 <빛의 과거>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들뢰즈적 프리즘으로 기억을 들여다본다. 1977년 대학 신입생 시절 여자대학 기숙사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관계와 사건 들을 그로부터 40년 뒤에 다시 소환하는 것이 이 소설의 얼개다. 여기에다가 1977년과 2017년 사이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1977년을 다룬 소설 속 소설이 놓임으로써 사실과 그 재현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기억과 차이, 사실과 허구의 관계가 착종되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사태의 복합성과 인간관계의 다면성에 대한 이해는 깊어지게 된다.

1977년 대학 신입생 시절 이야기를 다룬 소설 <빛의 과거>를 낸 소설가 은희경이 4일 오후 소설 배경인 숙명여대 교정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모교에 오면 서투르고 어리석었던 학생 시절이 떠올라서 오히려 긴장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표면적으로 <빛의 과거>는 대학 신입생의 입사를 다룬 성장소설의 외양을 지닌다. 지방 출신으로 서울의 여자대학에 입학한 주인공 김유경이 기숙사에서 만난 이들과 어울리며 겪는 일들, 청춘의 성취와 좌절, 그를 통한 인간적 성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숙사라는 공간은 성년이 된 유경이 다름과 섞임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깨닫는 학습장으로 구실한다.

기상과 아침 식사, 저녁 점호, 면회와 전화 통화 등 기숙사의 일과와 규칙, 미팅, 수업 거부, 아르바이트, 봄 축제와 가을의 오픈하우스 행사, 학보사 수습기자 활동, 여행 등 지난 시절 대학 생활의 이모저모가 정겹게 그려진다. 대학가요제와 음악감상실, 영화 <겨울여자>, 가짜 대학생 사건, 고속 터미널의 추석 귀성표 예매 행렬과 완장 찬 남자들이 휘두르는 장대 같은 문화사 및 풍속사적 세목들이 추억을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대학별곡>(김신)의 여학생 버전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는 긴급조치 9호의 시절. 주권자의 숨통을 틀어막았던 이 사회적 질곡은 <빛의 과거>의 저변을 복류하듯 흐르다가 사소한 계기를 만나 화산처럼 분출한다. 오픈하우스 행사 날 우연찮게 여대 기숙사에 숨어든 남학생이 시국 사건과 관련한 수배자로 밝혀지면서 ‘방장’ 격인 유경의 선배 최성옥은 퇴학 당하고 그와 친했던 다른 ‘방장’ 송선미는 자퇴하며 유경 자신은 학보사 기자 일을 그만두게 된 것. 여기에 ‘썸남’ 이동휘의 작별 편지까지 더해지면서 유경의 대학 신입생 시절은 우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흘러가 사라진 줄 알았던 40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은 그러나 한 친구가 쓴 소설 덕분에 되살아난다. 기숙사 동료였던 김희진의 그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뒤늦게 읽은 유경은 “그녀가 본 세상이 내가 본 것과 너무도 달랐”다는 사실에 놀란다. 물론 희진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고 그에 맞춰 자의적인 논리를 갖다 붙이곤” 하는 사람이고, 소설적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는 등장인물을 과장하고 희화화할 수는 있다고 해도, 기초적 사실 관계와 인물 됨됨이조차 유경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그려졌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기억의 본질에 새삼 회의를 품게 만든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왔던 걸까.”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희진은 물론 신뢰하기 힘든 화자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가 그린 유경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맹목으로 무지했거나 무시했던 본질을 꿰뚫어본 것임을 유경은 늦게나마 알게 된다.

“김희진이 소설에 쓴 대로 그때의 나는 허위의식과 자기방어의 성채에 갇혀 있었고 둘 중 어떤 것을 건드리든 비관적으로 변하게 돼 있었다.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희진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전에 유경은 “그녀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유경 역시 희진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희진이 감당해야 했던 “고독과 가난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은 모욕”을 유경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며, 오픈하우스 행사 날의 파국에 희진이 연루된 정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경과 희진은, 은희경의 등단작 <새의 선물>의 주인공 소녀 진희와 이모처럼, 일종의 그림자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희’진과 유‘경’에는 은희경의 이름 두 글자가 나뉘어 들어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 속 소설인 <지금은 없는…>의 마지막 장면으로 처리되는데, 그것은 유경과 희진으로 분리되고 대립했던 기억이 차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화해하고 합일을 이루는 과정처럼 보인다.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으로.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하는 빛이었다.”

7년 만에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낸 소설가 은희경.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빛의 과거>에는 1977년 여대 신입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으며 1년간 학보사 기자로도 활동한 은희경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배어 있다. 4일 오후 모교인 숙명여대에서 만난 은희경은 “소설 주인공 유경에 대학 시절 내 모습이 많이 반영돼 있다”며 “소설 속 희진의 소설이 처음에 내가 쓴 소설이었는데 왠지 진척이 안 되다가 희진을 화자가 아닌 소설 속 인물로 바꾸니까 다시 글이 진행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기성세대 치고도 연만한 나이가 된 유경은 자신과 자기 세대의 책임과 과오를 이렇게 자백한다. 은희경은 “당시는 대학생이 하나의 기득권이어서 시스템에 적응하고 안전한 부류에 포함되려 했던 것 같다”며 “특히 여성들의 취약하고 위험한 상황은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는데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의 젊은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7년 만에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낸 소설가 은희경이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교정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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