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0 06:02
수정 : 2019.09.20 20:12
박상순 시인 이상 시 해설서
‘나는 장난감 신부와…’ 출간
한글 시 50편 풀어쓰고 해설
“이상 시의 중심은 회화성”
“낡은 언어체제로 해석 경계”
식민지 현실의 맥락 강조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박상순 옮기고 해설/민음사·1만6000원
이상(1910~1937)은 한국 시의 난해와 실험을 대표한다. 1980년대의 해체시 또는 2000년대 미래파가 추구한 새로움을 이상은 일찍이 1930년대에 훨씬 과격한 방식으로 선보였다. 그런 면모는 이상 시를 지금도 연구와 토론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현대성이겠지만, 동시에 웬만한 독자로서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 자신 해독하기 쉽지 않은 시를 쓰는 시인 박상순이 이상의 한글 시 전편을 꼼꼼하게 해설하고 이상 시 세계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안내서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를 내놓았다. <가톨닉청년> 1933년 7월호에 발표한 ‘꽃나무’에서부터 유고로 발견한 ‘무제 2’까지 50편을 대체로 발표 순서대로 다루었다. 기존 전집 등에 산문으로 분류되어 있던 ‘최저낙원’을 시로 보아 포함시킨 것이 이채롭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슬픈 감자 200그램> 같은 시집을 낸 박상순 시인은 서울대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북디자이너와 출판 기획자로 수백 권의 문학 및 인문학 책을 만들었다. 이상 역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와 건축기사로 일하는 한편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해 입선했으며, 출판 편집과 삽화, 표지 디자인 등의 작업을 했다. 이력이 겹치는데다 시의 경향에서도 친연성을 보이는 만큼 박상순 시인은 이상 시 해설자로 적임자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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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시 해설서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를 낸 박상순 시인.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서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던 이상이 시에서 선보인 형식 실험은 그 나름의 저항의식의 발로요 새로운 현실을 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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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이 이상 시에 접근하는 열쇳말은 ‘회화성’이다. “이상의 시에는 회화적 시선이 중심을 차지한다”고 그는 단언한다. 여기서 회화는 수묵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판화, 콜라주 등 평면 조형예술의 온갖 형태를 아우른다. 박 시인은 동양과 서양의 그림과 회화론은 물론 큐비즘, 다다,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네덜란드 신조형주의 등 서양의 20세기 미술 운동사를 종횡하며 이상 시의 회화적 특징을 설명한다.
이상의 실험적이고 난해한 시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이 ‘오감도 시 제4호’다. 1에서 0까지의 숫자판 열한 줄을 나열하고 숫자들 사이에 사선으로 검은 점을 찍은 뒤 그 전체를 뒤집은 형태를 제시해 놓고는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이상 책임의사 이상’ 등의 문구를 앞뒤에 배치한 이 기묘한 시는 발표 당시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고 있는 문제작이다. 박상순 시인은 이 작품을 기존의 언어 질서로 해석하거나 이상 개인의 무의식의 발현으로 보려는 시도들을 “구식 언어체제의 방식” “보수적·교조적 태도” 등으로 비판하며 “이상의 뒤집힌 숫자판은 ‘그림’이다”라고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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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미술반 습작실에서 포즈를 취한 시인 이상. <문학사상>을 통해 권영민 교수가 공개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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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작품에 굳이 의미가 있다면, 기존의 의미를 뒤집어엎었다는 의미는 있겠죠. 시를 쓴 나 자신이 뒤집혔다는 느낌,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다는 느낌 등을 뒤집은 ‘그림’으로 표현한 이미지, 일종의 ‘시각시’ 형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1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박상순 시인은 그러면서 “서구의 첨단 언어 실험 사례들을 나름대로 찾아 보았지만, 이상처럼 숫자를 뒤집어 표기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이것은 뒤샹의 <샘>에 버금가는 사건이자 세계 문학사에 내놓을 만한 이상 고유의 등록상표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로 시작하는 ‘오감도 시 제2호’와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로 시작하는 ‘오감도 시 제3호’를 설명하면서 박상순 시인은 아인슈타인이 1922년 노벨상 수상 뒤 일본을 방문해 여러 차례 강연한 사실을 들며 이 시들이 “시간과 장소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난해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일 것이라 여기기 쉬운 이상 시가 식민 치하 조선의 현실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그에 개입한 결과라는 설명도 주목할 만하다. 가령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놓고보니”라는 ‘이런 시’의 도입부를 가리켜 박 시인은 “그 돌은 분명 1930년대 어수선한 한반도 공사판의 돌, 뿌리뽑힌 역사의 돌”이라며 “그가 이룩한 실험적 언어 뒷편에는 소시민의 눈으로 본 역사적 현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산책의 가을’에서 인쇄소 직공들과 “좌(左)로 된 지식”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대목을 두고 “프롤레타리아적 관점도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이해한다든지, “당시 청계천은 빈민과 거지 들의 주거지였다”고 설명하는 데에서도 이상 시를 당대 현실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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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시 해설서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를 낸 박상순 시인이 18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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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은 “이상은 누구보다 당대 현실 안에서 고통 받으며 성장해 글을 썼고 또 누구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관찰했다”며 “거지와 빈민 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이상을 세워 두고 그의 시를 다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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