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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7 06:00 수정 : 2019.09.27 20:08

사랑이 남긴 흔적 전부 저장하는 ‘이별의 박물관’
와인 오프너·할복용 칼·쪽지 등…저마다의 사연 담겨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엮음, 박다솜 옮김/놀·1만6000원

사랑은 연필로 쓰라고 노래하는 유행가가 있었다. 이유인즉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별의 박물관’ 전시 프로젝트를 시작한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그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기로 했다. 4년간 함께 살다가 사랑이 끝나 헤어지기로 한 두 사람 모두가 좋아한 추억의 물건이 있었다. 오랫동안 현관을 지킨 ‘허니 버니’라는 이름의 작은 태엽인형이 그것이었다.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사랑이 남긴 유무형의 흔적을 전부 저장하는 보관소를 만들자는 계획”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6년 크로아티아의 지역 예술 축제에서 ‘이별의 박물관’이 첫선을 보였다. 물건이 있었고, 주인의 이름은 익명이었으며, 주인이 남긴 개인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져 전시되었다. 베를린, 샌프란시스코, 류블랴나,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의 아라리오뮤지엄을 포함한 수많은 도시의 사람들이 이별의 물건과 사연을 선보였다. 아라리오뮤지엄의 전시는 <실연의 박물관>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는 비슈티차와 그루비시치가 기부받은 전시물 중 일부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와인 오프너. 1988년 1월23일~1998년 6월30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놀 제공
첫 물건은 와인 오프너다. 기증자 이름은 익명, 기증자에게 물건을 준 사람도 익명. ‘1988년 1월23일~1998년 6월30일’이라는 기간은 관계가 지속된 기간이겠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수집된 이 와인 오프너의 사연은 이렇다. “당신은 내게 사랑을 이야기했고 매일 작은 선물을 주었다. 이 오프너도 그중 하나다. 당신은 자주 내게서 고개를 돌렸고 나와 자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신이 에이즈로 죽은 뒤에야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았다.”

별의 스펙트럼. 1년. 중국 베이징.
양쪽 모두 천문학자였던 연인. 연인이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상대방에게 지구에서 26광년 거리에 있는 ‘파이3’이라는 별의 스펙트럼을 선물로 주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이 별을 떠난 빛은 무한한 성간 공간과 수없이 많은 먼지와 성운을 지나, 26광년이 흐른 지금 이곳에 도착했어. 너도 그래. 여기서 너는 네 별빛을 만나고, 나는 너를 만나는 거야.” 장대하고 아름다우며 시적이지 않은가? 관계는 1년 동안 지속됐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헤어졌다.

<실연의 박물관>도 그랬지만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역시 오래 지속된 추억도 있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열정(하지만 요란하게 뜨거웠던)의 기록도 많다. 그리고 그 사연들이 동료애를 불러일으킨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만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런 사랑과 저런 사연과 물건 사이에서, 아는 무언가를 만날 것만 같은 느낌 속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불쾌한 추억의 물건도 많은 건 놀랄 일이 아니리라. 생일 선물로 받았다는 할복할 때 쓰는 칼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손뜨개 도일리. 2015년. 시리아 라타키아. 놀 제공
그렇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만을 경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애적인 사랑만 사랑인 건 아니니까. 시리아 라타키아에서 수집된 손뜨개 도일리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만들어 준 것이었단다. 당시 어머니는 손가락에 통증이 있었고, 눈에도 문제가 있었다. 엄마의 일부처럼 느껴져 지니고 가야 할 것만 같은 물건이었다. “엄마가, 그리고 그녀가 우리를 키운 방식이 자랑스럽다.” 한 번도 아버지다웠던 적 없었던 아버지의 물건을 내놓은 사람도 있다. <실연의 박물관>에는 아버지가 가족을 태우고 다니던 오래된 자동차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니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내게 있는 이별의 물건을 떠올리게 되리라. 죽은 가족에게서 온 문자메시지가 있는 구형 핸드폰, 애인이 남겨두었던 별것 아닌 쪽지, 사람은 신물 나는데 그새 절판되어서 버릴 수 없는 선물 받은 책. 아, 금붙이는 벌써 팔아버렸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샴페인 코르크. 2년 반. 영국 런던. “나는 2011년 8월6일에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식을 올리기 반 년 전에 약혼자가 바람 피우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코르크는 운 좋은 탈출을 자축하며 마신 샴페인에서 나온 것이다.” 놀 제공

마네킹 손. 5년. 독일 베를린. “애증의 관계는 5년이면 충분했다. 어느 밤 나는 집을 나와서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내 방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우레탄폼 알갱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혼돈 그 자체였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마네킹은 사랑이 끝난 순간을 유일하게 지켜보았으므로, 그 장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놀 제공

일본도. 1999년~2001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 “그녀는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다. 우리는 모든 걸 함께했고, 여행도 함께했다. 우리의 관계가 차츰 내리막길을 걷던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생일 선물로 자신이 일본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사온 칼을 주었다. 그녀가 내게 준 칼은 사무라이 칼이 아니라 자살할 때 쓰는 할복 칼이었다.” 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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