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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9 14:08 수정 : 2019.09.29 20:29

지난 28일 오후 충남 부여 부소산 낙화암에서 ‘신동엽의 부여시대’ 문학기행에 참가한 일행을 앞에 두고 신동엽 시인 역할을 맡은 배우 김중기(왼쪽)와 신동엽의 문학동인이었던 노문 역할을 맡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상황극을 펼치고 있다.

신동엽 시인 50주기 부여 문학기행
생가와 문학관, 시비, 낙화암 등 답사
배우 김중기와 김응교 교수 상황극도

지난 28일 오후 충남 부여 부소산 낙화암에서 ‘신동엽의 부여시대’ 문학기행에 참가한 일행을 앞에 두고 신동엽 시인 역할을 맡은 배우 김중기(왼쪽)와 신동엽의 문학동인이었던 노문 역할을 맡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상황극을 펼치고 있다.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신동엽, <금강> 제23장 부분)

28일 오후 충남 부여 부소산 낙화암. 백제 멸망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금강변 절벽에 독자 40여명이 모였다. 신동엽(1930~1969) 50주기를 맞아 신동엽학회(회장 정우영) 주최로 열린 ‘신동엽의 부여시대’ 문학기행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지난 6월15일 신동엽의 서울 자취를 좇는 문학기행 ‘신동엽의 서울시대’에 이어 열린 이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신동엽의 부여 생가와 문학관, 시비 등을 찾아 그의 문학 정신을 기렸다. 금강변과 낙화암은 신동엽이 시상을 다듬느라 자주 산책을 했던 곳으로, 부인 인병선(짚풀생활사박물관장)과 연애 시절 나들이를 갔던 사진도 남아 있다.

이날 부여 문학기행의 마지막 장소였던 낙화암에서는 배우 김중기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짧은 상황극을 펼쳤다. 지난 6월의 ‘서울시대’ 기행 때에도 신동엽 역할을 맡아 연기했던 김중기가 다시 신동엽 시인으로 나왔고, 김 교수는 신동엽의 부여 시절 문학동인이었던 노문 역할을 맡았다. 부여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했던 노문은 신동엽이 전쟁 중에 퇴각하는 인민군부대 및 빨치산들과 한달 남짓 같이 생활했다는 증언을 담은 글 ‘석림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를 작성해 인병선 관장에게 건넸고, 이 자료는 지난 4월 출간된 <신동엽 산문전집>에 부록으로 실려 처음 공개되었다.

노문의 자료에서도 밝힌바, 신동엽은 빨치산과 같이 행동하기는 했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빨치산 체험이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시 ‘진달래 산천’을 낳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뼈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진달래 산천’ 부분)

김지윤 시인이 ‘진달래 산천’을 낭독하는 사이 사이, 김중기 배우와 김응교 교수는 “사랑과 혁명의 시” <금강>, 그리고 신동엽의 빨치산 체험과 시 ‘진달래 산천’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제 멸망의 상징적 공간인 낙화암에서 동학농민전쟁과 6·25 전쟁이 만나는 형국이었다.

지난 28일 낮 충남 부여 신동엽 시비 앞에서 신동엽 시인 역할을 맡은 배우 김중기(왼쪽)와 김수영 시인 역할을 맡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앞서 이날 오전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내려온 문학기행팀은 시인의 모교인 부여초등학교 교정의 신동엽 시비부터 둘러보았다. “진달래,/ 부소산 낙화암/ 이끼 묻은 바위서리 핀/ 진달래,/ 너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었다.”(<금강> 제5장 부분) 부여 출신인 이지호 시인은 “1911년 부여보통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에 신동엽이 1938년에 입학해 1944년에 졸업했으며, 졸업 뒤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한 신동엽은 초등학교 동창 등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다음으로 찾은 부소산 고란사와 낙화암 맞은편 백마강변 백사장은 “시인의 등단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와 <금강>의 구상 장소로 추측된다”고 이지호 시인은 말했다.

신동엽 1주기였던 1970년 4월 동남리 소나무숲에 세워진 시비에는 그의 시 ‘산에 언덕에’ 일부가 새겨졌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시비 앞에서는 역시 신동엽 역할을 맡은 김중기 배우와 이번에는 김수영 시인으로 분한 김응교 교수의 상황극이 펼쳐졌다. 1968년 6월 김수영이 숨졌을 때 신동엽은 ‘지맥 속의 분수’라는 추도사를 써서 신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도 되기 전에 한반도는 ‘두 번째 위대한 증인’인 신동엽을 잃었다. 김수영 역할을 맡은 김응교 교수는 “내 시에 ‘거대한 뿌리’라는 게 있지만, 사실 나는 부끄러워요. 오히려 신 형(=신동엽 시인) 시야말로 민족의 거대한 뿌리가 아닌가 싶어”라고 신동엽을 평가했다.

이곳 신동엽 시비 앞을 위협하듯 가로막고 서 있던 ‘반공애국지사추모비’는 다행히 2014년 12월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시비의 분위기와 정신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신동엽의 부여시대’ 문학기행에 참가한 이들이 28일 낮 충남 부여 신동엽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비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은 오후 2시부터는 시인의 생가와 그 옆 신동엽문학관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열린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제와 전국문학인한마당 행사에 참여했다.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과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함세웅 신부와 배우 문성근 등의 추모 발언에 이어 신동엽 시인의 장남인 신좌섭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아버님은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시와 음악과 미술과 무용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을 꿈꾸었고 등단 뒤에도 끊임없이 시극 운동을 펼친 분이었다”며 “올해 50주기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신동엽을 알리는 일종의 캠페인 기간이었다면, 내년부터는 아버님의 작품 세계에 대한 더 본질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낙화암 일정을 마친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구드래나루에 내린 문학기행팀은 해가 지는 낙화암을 뒤로 하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가 신동엽 부여기행을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신동엽의 대작 <금강>은 4·19 혁명에서 추구했던 민중혁명 정신을 동학농민전쟁에서 찾아보려 한 작품입니다. 동학이나 4·19나 둘 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셈이지만, 그럼에도 문학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부여기행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여/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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