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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4 06:02 수정 : 2019.10.04 20:31

허수경 1주기 맞아 유고집 나와
일기 같고 습작 같은 시작노트에
마지막 시들과 시론 함께 엮어

홍대 앞 맥주를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고국 향한 애증
결핍과 사랑의 시쓰기 방법론도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허수경 지음/난다·1만6000원

‘가기 전에 쓰는 시들’이라고 썼다가 ‘시’에 빗금을 긋고 ‘글’로 고쳐 넣었다. ‘시’와 ‘글’은 시인의 마음에서 그렇게 통하기도 하고 어그러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은 지난해 10월3일 세상을 뜬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유고 모음이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쓴 시작 노트,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 이후 발표한 시 13편, 그리고 자신의 시집과 시세계에 관해 쓴 글 두 편이 한데 묶였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

이승에서의 삶이 채 반 년도 남지 않았던 지난해 4월15일에 쓴 마지막 시작 노트에서 시인은 행과 연을 나눈 시 형식 글로 이렇게 다짐했다.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그것이 출발의 다짐이었다면 허수경의 다짐에서는 주어진 운명을 수긍하는 자세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런 결산과 수용에 이르기 직전 단락에서 허수경은 아직 자신이 그 일부인 세계를 향한 강렬한 애정과 미련을 감추지 않는다. 병이 깊은 자신이 먹지도 못할 귤을 쪼개서 그 향을 맡는 장면이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쓸 것인가? 이 모든 시간을 다 합하여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예!’ 하고 저는 답할 것입니다”라고, 지난해 6월 말 후배 시인에게 보낸 이육사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시인은 썼다. 허수경 시인의 1주기를 맞아 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 나왔다. 사진은 2005년 독일 뮌헨에서 만난 허수경 시인.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 실린 글들 모두가 죽음을 예감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독자에게는 역시 이 책이 시인의 작별 인사로 다가올 법하다. 사반세기 넘게 먼 이국에 머물렀으며 임종도 장례 참석도 고국의 독자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시인이기에, 1주기에 맞춰 나온 유고집은 그만큼 반갑고 안타깝다. 죽은 그를 남은 우리가 그리워하듯이, 아니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시인이 먼 나라에서 고국과 문우들과 모국어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책에서 확인하는 일은 특히 고통스럽다. “내가 나를 유배시켜놓고 혼자 낮술을 마신다”거나 “홍대 앞에 가서 아주 차가운 맥주 한잔 마시고 싶은 날” 같은 대목에서 술을 핑계로 드러내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곳의 우리가 충분히 헤아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을 낸 직후인 1992년 시인이 뜻밖의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것이 이처럼 긴 이별의 시작일 것이라 짐작한 이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학위를 마친 뒤에는 돌아오려니 싶었던 기대도 저버리고 그가 ‘자발적 유배’를 택해 현지에 눌러 앉은 까닭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추측이 나왔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번 유고집에 실린 시작 노트에는 그 까닭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나의 부모가 언제나 나를 파먹었다는 슬픔이 있다. 아마도 나의 근원적인 삶의 불구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며 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슬픔 그리고 삶의 왜곡과 결여에 대한 인식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떠나고 끝내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독일에 머무르면서 슬픔과 왜곡과 결여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른 글에서 그는 “나의 가장 오래된 상처에 속하는 것은 그곳을 떠나왔다는 것이다”라고 토로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모국어를 운명으로 삼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내 책들은 다 고아다”라고 쓰면서 그는 모국어와 그 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엮어야 하는 작가의 고통을 죽은 부모의 심정에 빗댔다. 그렇다면 이제 이 책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비롯한 허수경의 책들은 이중으로 고아가 된 셈이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의 시작 노트는 일기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역시 시와 문학에 관한 시인의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자료로서 소중하고 반갑다.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시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2017년 4월, 나이 든 남편의 병세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던 시인이 그로부터 불과 두 달 뒤에는 스스로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한 일을 ‘보고’한다. 그로부터 시작 노트는 시와 문학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더 근본적인 일들에 관한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된다.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 십이층의 드넓은 창문으로 바라보는 여름 새벽으로 새떼가 날아오른다. 저 멀리 아직도 불을 켜고 있는 건물들 사이로 새들은 날아간다. 이 풍경을 나는 얼마나 기억하게 될까?”(2017년 7월10일)

죽음은커녕 아직 병의 기미조차 멀기만 했던 2012년 벽두의 글에서 “죽은 나여 안녕”이라는 구절을 쓸 때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로부터 4년여 뒤에 발표한 글에서 “이 시간은 우리가 살아 있으므로 가능한 우리의 사건인 것이다”라고 쓸 때에 그는 불과 1년여 뒤의 발병을 짐작이나 하고 있었을까. 대답 없는 시인의 침묵 앞에서 독자는 그가 남긴 마지막 시를 하릴없이 곱씹을 따름이다.

“너를 사라지게 하고/ 나를 사라지게 하고/ 둘이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가 된 것도 아닌 그 자리에/ 이상한 존재가 있다,/ 서로의 물이 되어 서로를 건너가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종이배처럼”(‘안는다는 것’ 전문)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허수경(1964~2018)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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