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1 10:48
수정 : 2019.10.11 16:16
작년 공쿠르상 수상작 ‘그들 뒤에…’
쇠락한 고향서 탈출 꿈꾸는
소도시 청소년들 성장통 그려
술과 마약, 섹스에 탐닉하면서도
순정을 놓지 않는 소년 앙토니
“90년대 자체가 미완의 청소년기”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니콜라 마티외 지음, 이현희 옮김/민음사·1만7000원
“이제는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이렇게 시작하는 구약 집회서 44장과 그 이후 장들은 권세와 글과 돈 등으로 이름을 얻고 주님의 영광을 드높인 이들을 거명하며 그들을 기린다. 잘나가는 이들의 열전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만큼 이름을 알리고 후세에 기억되지 못하는 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집회서 44장 9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공쿠르상 수상작인 니콜라 마티외의 소설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바로 그런 이름 없는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로 번역된 제목은 위에 인용한 집회서 중 “그 뒤를 이은 자녀들”에 해당한다. 작가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집회서 44장 9절을 제사(題詞)로서 제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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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 행사에 참가한 프랑스 소설가 니콜라 마티외. “문학은 언어로써 감정적 진실을 생산해 내는 방법이자 세계 속에서 내가 나로 설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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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동부 가상의 소도시 에일랑주를 무대로 삼은 이 소설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의 시기를 다루며, 소설이 시작될 때 열다섯 살이었던 소년 앙토니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때 지역 경제의 중심이었던 제철소에서 근무하던 아버지 파트릭은 제철소가 문을 닫은 뒤 이런저런 허드렛일로 가족을 먹여살린다. 젊은 시절 “에일랑주에서 엉덩이가 가장 예쁘기로 소문이 났”던 엄마 엘렌은 가난과 남편의 폭력 앞에 시든 배추처럼 생기를 잃었다. 그들의 외아들 앙토니는 어떤가. “학교에선 꼴찌에 뚜벅이 신세,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조차 서툴기 짝이 없는 신세”를 자책하며 한없이 움츠러들 뿐이다.
소설은 1992년과 1994년, 1996년, 1998년 네 장으로 나누어 앙토니와 주변 사람들의 90년대를 그린다. 미국 록밴드 너바나의 노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을 내세운 첫 장을 비롯해 소설 각 장은 건스앤로지스, 쉬프렘, 글로리아 게이너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제목으로 삼아 당대 분위기와 소설 속 이야기를 전해 준다.
소설이 시작되면 앙토니와 사촌은 카누를 훔쳐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가 또래 소녀 스테파니와 클레망스를 우연히 만난다. 부유한 집 딸인 데다 얼굴도 예쁜 스테파니에게 앙토니는 첫눈에 빠져든다. 계급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가질 수 없는 여자”였지만, 그럼에도 스테파니를 향한 앙토니의 순정은 소설의 핵심적인 모티브로 구실한다. 소설 뒷부분에 가면 스물한살이 된 앙토니가 술에 취한 채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스테파니네 집 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 부분은 어쩐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떠오르게 한다.
앙토니와 스테파니를 비롯해 십대 중후반인 소년·소녀들이 술과 마리화나에 젖어 지내며 섹스에 몰입하는 모습은 역시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한다. 모로코 출신 이민자인 청년 하신이 아버지에게 가혹한 매질을 당하고 방에 갇히는 장면 역시 다른 측면에서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앙토니와 사촌은 스테파니와 그 친구가 참가하는 파티에 초청을 받고, 앙토니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몰래 타고 파티에 가는데, 그곳에서 그만 오토바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오토바이를 훔친 게 바로 하신이거니와, 오토바이를 매개로 한 앙토니와 하신의 대립은 소설의 또 하나의 모티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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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쿠르상 수상 작가인 니콜라 마티외가 9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살림터 2층 크레아홀에서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 행사에 참가해 자신의 수상작 소설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을 낭독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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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쇠락한 데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 소도시의 젊은 거주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탈주를 꿈꾼다. 앙토니는 “멀리 떠나기를 꿈꾸었”고, 하신도 “철조망에 갇힌 것처럼 갑갑”함을 느꼈으며,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화려한 삶을 사는 스테파니조차 “언젠가는 파리지엔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줄에 매인 염소처럼 에일랑주를 떠났다가도 이내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집회서 속 “자녀들”처럼 부모의 희박한 존재감을 유산처럼 또는 운명처럼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게 만드는 수치심,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 촌구석에서 날이면 날마다 뜨개질하듯 이어지는 삶, 아버지들과 너무나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 느릿하게 찾아오는 저주까지. 앙토니는 복제된 일상이 가져다주는 선천성 질병 같은 삶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앙토니와 하신, 스테파니의 개인적 삶을 구획하고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상황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생산에서 서비스로 경제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실직자가 된 파트릭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작아지고 소외되었으며 불확실해졌다.” 그가 결과적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오토바이 도둑 하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변화를 향한 분노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주먹은 멀리서, 어깨와 등에서, 허리춤과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왔다. 그 주먹은 지난날의 고통과 절망을 전부 실어 날랐다. 불행과 불운, 잘못된 삶의 무게가 함께 실려 묵직했다.”
9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만난 니콜라 마티외는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9·11 테러 사이에 걸쳐 있는 90년대란 무언가 결정되지 않은 채 유보되어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청소년기와 같다”며 “나 자신이 청소년기를 보낸 90년대를 배경으로 세 명의 청소년을 통해 사회적 소외와 운명에 대해 쓴 소설이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이다”라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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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쿠르상 수상작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민음사) 작가 니콜라 마티외가 9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살림터 2층 크레아홀에서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 행사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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