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염승숙 지음/문학동네(2019) 한국에서도 리메이크된 적 있는 일본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서 남녀 주인공은 후쿠시마 지진을 계기로 결혼한다. 지진으로 도쿄의 교통이 멈춰버린 날 그저 아는 사이였을 뿐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밤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는 한 외국인 유학생도 지진 이후에 동료 유학생과 결혼했다. 지진을 겪고 나니 무섭고 외로워서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고. 사랑이나 유대 같은 관계는 결국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것을 겪으면서 뒤늦게 마음이라는 것이 동요하고 감정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발밑이 통째로 흔들리는 지진 같은 것에 의해. 지진으로 가까워진 또 한 커플이 있다. 발밑이 흔들리는 지진 때문에 하진은 이마에 상처를 입었고, 하진 쪽으로 넘어지는 스탠드를 잡으려다가 류는 화상을 입었다.(‘거의 모든 것의 류’) 지진을 함께 겪고 두 사람은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고백하거나 갑작스레 결혼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류는 지진을 먼저 감지하고 양손으로 책상의 모서리를 꽉 잡고 있었는데 마치 지구라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가 흔들리고 있는데 결연하게 지구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니. 지진 때문에 가까워졌으나 그에게 다가오는 류의 마음을 하진이 붙잡지 않았던 것은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리는 지구를 견디기 위해 지구를 붙들어야 하는 불안함에, 또는 흔들리는 것에 마음을 기대야 하는 일의 피로함에 이미 지쳐 있었을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것은 지구뿐만이 아니다. 하진이 속한 세계 전체가 흔들린다.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해서 아르바이트나 단순 사무직을 전전하며 겪은 멸시와 치욕은 그의 존재 자체를 흔든다. 마음은 그렇게 부서졌고, 부서진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가 흔들리는데 마음만 혼자 굳건할 리가 없다. 우선 무례하고 모욕적인 세계가 반듯해지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소설은 부서진 마음을 채근하지 않고 당장의 위로도 안도도 없이 오래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며 오래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이 소설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류와 있던 직장이 문을 닫고 하진이 옮겨간 직장은 여전히 발밑이 흔들려 마음까지 흔들리는 곳이었다. 화장실 바로 옆에서 벽을 보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하진은 류와 류가 썼던 소설을 떠올린다. 치타와 머리카락이 있는 개구리가 나오는 그 이상한 소설을, 개구리가 느낀 슬픔을 뒤늦게 이해한다. 좀처럼 가 닿지 못하지만 어느샌가 잊을 수 없게 된 누군가가 흔들리는 지구처럼 우리를 지켜준다고 말해도 될까. “비루하고 황폐한 세계에 남겨진 단 하나의 테이블”처럼. 그러므로 안도하게 된다. “인간이 이렇게나 어설프고 우연하고 따스하고 가여워서.”(‘추후의 세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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