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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5 05:59 수정 : 2019.10.25 20:22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 세시 책읽기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창비(2019)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 <밀크맨>은 놀라운 해독 소설이다. 이야기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쑥덕쑥덕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내가 밀크맨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열여덟 살이고 밀크맨은 마흔한 살. 사실 나와 밀크맨은 그렇고 그런 사이기는커녕 두 번 일방적으로 밀크맨(공동체의 저명한 유부남 테러리스트인)이 말을 걸었고 그때마다 나는 몸이 떨릴 정도로 불쾌감을 느꼈다는 게 진실이다. 나는 엄마에게 밀크맨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말했지만 엄마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안됐지만 자기도 알아야 해!”라면서 다 말해주었고 세상에 하고많은 남자 중에 하필이면 그런 남자를 만나냐면서 내가 밀크맨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기정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랍지도 않은데 그 공동체 사람들은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것처럼 남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그다음에는 철석같이 믿고 살을 붙이고, 아니라고 말해봤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적은 없고, 그런 헛소문은 바로잡히지도 않는데 생각을 바꾸려면 엄청나게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에게 수작을 건 또 다른 젊은 놈은 여자 화장실에서 권총으로 내 얼굴을 때리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를 거절했고 자기만의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하는데 혼란과 모욕만을 줬으므로 더러운 년이고 이제라도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맞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얻어맞고 공동체 남자들의 즉결심판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 지역 남자들은 강간을 완전 강간, 4분의 3 강간, 2분의 1 강간, 4분의 1 강간으로 나누었고 이것은 강간과 강간 아닌 것 둘로만 나누는 것보다 젠더 감수성이란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 우리 삶의 한 측면.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바로 이렇게 삶의 활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얄팍하고 인습적이고 낡고 편협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생각들에서 활기를 얻고 그렇게 빈약한 말들을 옮기고 말만큼이나 빈약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놀라운 해독 소설인 이유는, 이쯤 되면 이렇게 살라 저렇게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찍힌다, 라는 사회적 압력과 루머라는 치사량의 독약에 치명적으로 중독될 듯한데 ‘나’는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하나 받았으되 맛이 가지 않고 열려 있고 너무나 제정신이기 때문이다. ‘나’ 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고 치사하고 냉정하고 나쁜 사람들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신경 쓰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한다.

이 소설의 끝은 아주 아름답다. 나의 셋째 형부는 내가 그놈에게 얻어터진 게 신경 쓰여서 이렇게 묻는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렇다니까요.” 그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이 문장에서는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사실 가장 부드러운 것은 사람의 변화다. 그 느낌을 받을 때 그제야 숨 쉴 만하고 밝기에서도 온기에서도 빛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입김이 나온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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