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5 06:02
수정 : 2019.10.25 10:35
들려준 것과숨긴 것-영국 모험소설의 정치적 무의식
소명출판·3만3000원
영국 모험문학의 대명사인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음험한 팽창주의 전략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탈식민주의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선보인 문제의식이다. 이석구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자신도 박사학위 연구를 통해 “고상한 척하는 인문학의 세속적인 민낯을 폭로하는 일종의 ‘심문’” 같은 걸 수행했노라 고백한다.
이 교수가 최근 내놓은 단행본 <들려준 것과 숨긴 것-영국 모험소설의 정치적 무의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기존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보지 못했던 것, “소리 높여 들려주는 메시지 외에도 특정 메시지의 고지(告知)를 위해 들려주지 않기로 선택한 내용”을 포착해야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좌파 문학이론가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이나 마슈레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좌파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을 저본 삼아, 이 교수는 “텍스트가 표면적으로 표방하는 바에만 ‘착하게’ 집중하는 길들여진 비평으로 전락”하지 않고, “작가의 의도나 기획을 거슬러 텍스트를 읽는 ‘나쁜 비평’”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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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4월25일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초판본 표지. 소명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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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E). 엠(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서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스트 서사를 발견”한다면, 이 교수는 “포스터가 자신의 정치적 의제를 위해 어떠한 역사나 집단적인 기억을 텍스트에서 삭제”했는지 파고든다. 말하자면 “간디는 이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텍스트가 은폐하는 식민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식이다. “포스터는 당대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세포이 항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배제하고 대신 친영적인 인도인으로 서사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 지하드와 같은 당대의 폭력적인 혁명 활동뿐만 아니라 식민지 정부를 당혹하게 만든 거국적인 반영 불매 운동까지도 텍스트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런 전복적 비평을 위해 지은이는 책의 들머리에서 데카르트의 주체론 뒤집기를 비롯한 철학적 탐구를 전개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는 서구에서 이성적인 근대 주체의 출현을 알리는 서곡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생각이 오직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의 보편적 진리와는 무관하게 개인 존재자에게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또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의존하는 것은 종교이다. 개인은 세계의 인식에 관한 한 무능력하다. 오직 완전하고 선한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이 객관적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훗날 철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초월주의에 의존하는 데카르트는 ‘어떤 중세인보다 더 중세적’이라는 평을 받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은이는 이런 데카르트의 불안함이, 합리성과 자율성을 무기로 식민지 경영주이자 자본가의 모습을 취하는 로빈슨 크루소에게서도 드러난다고 본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악한 존재가 있다는 두려움에 떠는 피해망상증 환자”의 모습에서 “애써 긁어모은 재산을 누군가 훔쳐가지 않을까 시시각각 불안에 떠는 훗날의 신경증적인 부르주아들”을 발견한다.
이 책의 미덕은,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하이데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역사, 정치경제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동시대 영문학 비평의 흐름 위에서 독창적인 연구를 펼친다는 데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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