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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1 06:00 수정 : 2019.11.04 14:16

한약조제시험이 실시된 1996년 5월19일 오전 시험장인 서울 은평구 갈현동 선정고 앞에서 한의대생들이 시험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약조제시험이 실시된 1996년 5월19일 오전 시험장인 서울 은평구 갈현동 선정고 앞에서 한의대생들이 시험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이브리드 한의학

김종영 지음/돌베개·2만원

조선에 온 최초의 서양 의사 알렌이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공격을 받은 권세가 민영익을 치료한 1884년 12월5일은 한국 의학사에서 중요한 날로 기록된다. 알렌의 성공적인 치료는 서양의학에 대한 고종 부부의 신뢰를 두터이 했고 이 땅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 설립으로 이어진다. 이후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운명의 궤도가 갈렸으니,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서양의학을 근대과학의 찬란한 업적으로 떠받든 반면 한의학은 미개한 전근대적 풍습으로 사갈시했다. 1914년 의사면허제도를 시행하면서 한의사의 지위를 ‘의생’으로 격하시켰으며 수십년이 지나면 대중의 신뢰를 잃어 아예 한의학이 사라질 것이라고까지 내다봤다.

전작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미국 유학파 엘리트를 통해 한국의 기득권 동맹을 조명했던 사회학자 김종영이 이번엔 ‘한의학’이라는 창구를 빌려 한국의 근대성을 재구축한다. 한의학은 탄압받고 천대받았으나 근대적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민중의 삶에 녹아들어 살아남았고 해방 이후 1951년엔 정부로부터 법적 승인을 받아냈다. 양한방 이원의료체계는 구축됐지만, 한의사들은 끊임없이 양의사·약사와의 영역 투쟁에 봉착했고, 특히 1993~1996년 치열한 한약 분쟁이 벌어졌다. 결국 한약조제시험을 통해 약사들이 한약 처방권을 갖게 되었고 한의사들은 여전히 의료기기 접근권을 제한받는 등 한의학은 의료권력의 주변부에 있지만 보건복지부 내에 한의약정책관을 신설하고 한국한의학연구원을 창립하는 등 제도적 성취를 이뤘다.

지은이는 ‘경계 사물’이란 개념으로 한의학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을 짚는다. 경계 사물이란 사회적 합의 없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공통의 사물·개념·형식을 가리키는 말로, 고정된 영역이 없기 때문에 늘 잠재적 갈등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구한말 이후로 지금까지 한의학은 서양의학과의 만남에서 지속적인 마찰을 빚으면서도 자체적인 근대화를 성취했고, 양의와 한의가 혼종되는 의료문화가 만들어졌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에 빗대자면, 한의학의 근대화는 ‘수목적’이라기보다 ‘리좀적’으로 이뤄졌다. 다시 말해, 나무/뿌리의 이미지를 가진 수목적 사유가 일관된 전체로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면, 땅밑에서 각자의 수염뿌리가 뻗어나가며 자유롭게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구근, 즉 리좀적 사유는 중앙집중화를 거부하는 탈중심적 세계를 이미지화한다. 한의학 연구자들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에스시아이(SCI·과학기술논문색인지수)급 논문을 쓰고, 한의학 약재가 바이오경제의 핵심기반이 되는 과정은 “한의학과 과학/양의학이 서로의 기원에 뿌리두지 않고 연합해 새로운 다양체를 이루며 공생·공기능”하는 전개를 보여준다.

지은이는 한의학의 가치를 설명하는 틀 중 하나인 동도서기론(동양의 정신, 서양의 물질을 강조하는 주장)을 배격하고, 동양의 물질과 서양의 물질 충돌 과정에서 한의학이 열세로 밀려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스페인 군대에 일망타진당한 16세기 잉카제국과 달리 한의학의 맥은 끊이지 않고 해방 이후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의 오래된 지적 갈등인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발전론을 극복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한의학의 근대화는 ‘일제식민지라는 난쟁이 위에 올라선 거인’으로 비유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싹튼 경제발전의 씨앗이나,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프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권력지형의 변화, 행위자들의 네트워크·집합체 구축 능력을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시대뿐 아니라 해방 이후 벌어진 많은 변화와 창조가 근대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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