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1 06:01
수정 : 2019.11.04 14:06
고전소설 다시 쓴 ‘좀비 썰록’
종말 이야기 ‘모두가 사라질 때’
장르문학 작가들 합동소설집 두권
좀비로 되살아난 ‘소나기’의 소녀
페미니즘적 재해석 ‘사랑손님…’
미완의 문장으로 끝난 종말 소설도
좀비 썰록
김성희 전건우 정명섭 조영주 차무진 지음/시공사·1만4300원
모두가 사라질 때
정명섭 조영주 신원섭 김선민 김동식 지음/요다·1만4000원
좀비와 종말은 특히 영화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다. 죽은 뒤에도 죽지 않는 사람, 인류와 지구 전체의 소멸에 대한 상상이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좀비는 실재하지 않고 종말은 아직 가시거리 바깥이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는 가공된 이야기를 통해 그것들을 간접 경험하고 싶어 한다. 느른하고 밋밋한 일상에 몸도 마음도 늘어질 때 좀비와 종말에 관한 상상은 뜻밖의 긴장과 활력으로 삶을 다시 탱탱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비와 종말을 소재로 삼은 합동 소설집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좀비 썰록>은 고전 작품을 좀비 이야기로 다시 쓴 소설 다섯을 담았고, <모두가 사라질 때>는 역시 다섯 작가가 각자 상상한 종말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명섭과 조영주가 두 소설집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것이 이채롭다. <좀비 썰록>에는 이들 말고 김성희 전건우 차무진이 참여했고, <모두가…>에는 신원섭 김선민 김동식이 동참했다.
차무진의 ‘피, 소나기’는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의 주인공 소녀가 좀비로 되살아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윤초시네 증손녀와 소년이 개울가에서 처음 마주치는 데에서 시작해, 입던 옷을 함께 묻어 달라는 소녀의 ‘잔망스러운’ 유언으로 처리되는 결말까지, ‘소나기’의 구조와 장면, 문장 들을 의식적으로 되풀이한 오마주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죽은 지 보름 만에 무덤 밖으로 나온 소녀는 죽기 전처럼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개울물을 연신 움켜 내고, 지켜보던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지고, 스웨터 앞자락에는 검붉은 진흙물이 들었지만, 그런 소녀의 모습에서는 결정적으로 생기가 빠져 있다. “온 세상이 푸르른데 오직 소녀만 잿빛 사진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시체’라는 소녀의 정체를 소년은 알아차리지만 “소녀는 자신이 죽은 줄 모른다.” 소녀에게 잘 보이고 소녀가 바라는 일을 해 주고픈 소년은 제 집 암탉을 잡아다 바치고 무덤 속 주검을 파헤쳐 해골에 붙은 살을 발라 먹도록 하며 시장에서 소 간을 사다 준다. 소녀가 마타리꽃을 든 모습이라든가 다리 아픈 소녀를 소년이 업어 주고 둘이서 원두막에서 소나기를 긋는 장면 등은 원작의 추억과 감동을 다시 만나게 한다.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좀비물로 각색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휘에서부터 정서까지 원작의 맛을 살리면서도 창조적 변형을 가한 솜씨가 돋보인다.
전건우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는 주요섭의 단편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패러디했다. 원작에서는 소설이 시작될 때 이미 죽고 없었던 아버지가 이 작품에서는 병에 걸린 채 아직 살아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의사가 치료를 위해 사랑방에 머무르는데, 그와 어머니가 모의해서 아버지를 독살하고 내처 시가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까지 몰살시킨다는 잔혹 동화의 틀에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 주목된다. 병자인 아버지가 평소 아내에게 툭하면 손찌검을 하고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를 가혹하게 대한다는 사실이 어머니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젠 아니 참을 테야. 엄마는 참는 여자가 아니야”라는 엄마의 말, 그리고 그런 엄마를 가리켜 “욕망이 들끓는 여자니까.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룰 줄 아는 여자니까 옥희 어머니가 대단한 거야”라 평가하는 사랑손님의 말이 페미니즘적 독해를 유도한다.
현진건의 동명 단편을 다시 쓴 조영주의 ‘운수 좋은 날’은 채식주의자 좀비라는 색다른 존재를 등장시킨다. 다름 아니라 현진건 소설의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 첨지가 좀비가 된 채 100년을 넘게 살아남은 것인데, 그가 이 소설에서는 대리기사 일을 한다는 사실이 재미지다. “당신, 운 좋은 줄 알아”라는 대사라든가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설렁탕 등이 현진건의 원작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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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종말을 다룬 합동소설집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사진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 <창궐>. 영화사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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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관동행: GAMA TO GWANDONG’과 정명섭의 ‘만복사 좀비기’는 각각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과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를 좀비물로 다시 썼다. 특히 ‘관동행’은 관동별곡을 가르치는 국어 교사의 입말투를 택했는데, 고전이라는 소재와 그 현대적 해석의 이중주가 흥겹고 신선하다. 이런 식이다. “좀비 마스터에 활 잘 쏘지, 옵션으로 잘생김까지 장착한 내비게이션 청년에다, 걸귀 물린 치료제인 김치 한 됫박까지 챙겼으니 완전 든든하겠지.”
정명섭 작가가 기획하고 동료 작가도 섭외한 <모두가 사라질 때>에서 정명섭의 표제작은 갑작스레 예고된 종말 앞에 사회 전체가 아수라장인 가운데 가족의 복수에 나서는 전직 경찰관의 활약을 그린다. “죽음과 광기로 가득 찬 나날들” 가운데에서도 돈을 지닌 소수들은 살 길을 찾기에 게으르지 않고, 혼란과 절망을 틈타 제 욕심을 챙기려는 이들은 오히려 바지런하고 주도면밀하다. 조영주의 ‘멸망하는 세계, 망설이는 여자’는 종말을 앞두고 ‘썸’을 타는 남자와 관계 진전을 망설이는 여자를 등장시킨다. 소설가인 여주인공은 결국 ‘밀당’을 끝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소설로 쓰며 거기에 ‘종말의 유예’라는 제목을 붙인다.
책 끝에 실린 김동식의 단편 ‘에필로그’에서 괴짜 소설가 ‘김동식’은 같은 종말 앤솔로지에 참여한 나머지 네 작가를 관찰하며 그들에게 훈계를 내린다. “매일의 일상을 살다가 전혀 예상도 못하고 맞이하는 게 진짜 현실감 있는 종말이라고! 당신들 글은 가짜야!”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그가 주장하는 ‘진짜 종말’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당장 이 순간에도, 왜, 어떻게 죽는지도 알지 못하고 갑자기,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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