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8 05:00
수정 : 2019.11.08 09:38
이은정 베를린자유대 교수 저서 ‘베를린, 베를린’
‘베를리너 12년’ 통찰 담은 단절과 통합의 역사
장벽 아래 하수도·지하철 공유하는 공간 특징
“민감한 내용 뺀 실용적 접근이 통일 이끌어”
베를린 장벽 붕괴 30돌에 맞춤해 ‘음울한 분단의 상징’에서 ‘세계에서 가장 힙한 문화중심지’로 변모한 베를린의 70년 역사를 다룬 <베를린, 베를린>(창비)이 나왔다. 35년간의 독일 생활 중 12년을 베를린에서 보내고 있는 이은정(
사진)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교수가 ‘베를리너’로서의 애정과 생활감각을 발휘해 단절과 통합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묘사한 책이다.
종전 뒤 4대 승전연합국에 의해 분할된 이래 베를린은 동독 영토 안에 달랑 놓인 섬과 같은 고립된 공간이었다. 1948~1949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 때 외부와 통하는 육로가 모두 끊긴 서베를린 주민들은 서방 국가들이 비행기에 실어 보낸 생필품 물자에 의존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동독·소련은 서베를린을 독립된 자치단위로 규정하고 서독과 분리시키려 했던 반면, 서독과 미국 등은 서독 연방주의 하나로 간주했다. 베를린의 이 애매모호한 위치는 미·소의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전면전의 불씨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분단이 곧 ‘차단’은 아니었다. 총연장 9725㎞가 넘는 베를린 전역의 지하 하수도시설, 동베를린을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서베를린 지하철 노선처럼 베를린의 얽히고설킨 공간 구조는 콘크리트 장벽으로도 가를 수 없었다. 동·서독은 베를린의 하수처리 비용, 지하철노선 이용료 등을 정산하기 위해 만나야 했다. 1961년 장벽이 들어선 뒤에도 동·서베를린은 통행증협정·여행방문협정 등을 체결하며 ‘장벽의 구멍’ 역할을 했고 1990년 통일의 영광을 가능케 했다. 이은정 교수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떼는 것이 낫다’고 역설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철학, 정치적 이해가 대립하는 민감한 내용은 처음부터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지 않는 실용적 접근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강조한다.
물론, 한반도와 베를린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독일은 한반도와 달리 전쟁을 겪지 않았다. 한반도의 분단은 남북으로 갈린 가족들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깜깜이 세월이었지만 동·서베를린 주민들은 편지왕래, 만남이 가능했다. 다만 장벽 붕괴 뒤 베를린에도 크고 작은 분란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90년 통일 기념식 안전관리를 담당할 경찰들의 임금을 책정하는 문제부터 각기 다른 교육을 받은 동·서베를린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대학입시(아비투어) 운영 방법까지 고민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처럼 예민한 일상의 이슈를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동·서독은 하나로 나아갔다.
돼지열병 방역처럼 남북 모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데도 공동대응에 나서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면, 베를린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미래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항구적인 평화로 나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한국이나 독일이나 마찬가지다. 서로의 차이에서 출발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agree to disagree). 출발점은 같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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