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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8 05:59 수정 : 2019.11.08 20:38

사건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민음사·1만800원

1963년 10월 그녀는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이상 기다렸다. 매일 저녁마다 수첩에 또박또박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썼고, 어떤 날은 자다가 깨어서도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했다. 어떤 날은 연극을 보러 갔고 어떤 날은 영화를 보러 갔지만, 생리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하루 불안은 가중되었다. 존 에프(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했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고, 지난해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은 이제 다시 쓸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운 좋게 제안받은 고등학교 프랑스어 강의도 못하겠다고 취소해버렸다. 자, 이제 생리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불법 낙태’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건>은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아니 에르노가 여대생 시절 경험한 임신 중지에 대해 쓴 적나라하고도 처절한 고백기다. 프랑스는 1970년대 중반 낙태를 합법화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미혼의 젊은 여자 임신부는 알콜중독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특히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첫 고등교육을 받은 에르노에게 혼전 임신은 ‘사회적 실패’의 낙인이자, 다시 가난이 물려준 운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뜻했다. 그래서 23살의 여대생은 스스로 자신의 자궁 속으로 뜨개질바늘을 쑤셔 넣기도 하고, 낙태 정보를 알려주겠다며 접근한 남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고난을 겪고 숱하게 발품을 판 끝에 결국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파리까지 가 불법 낙태 시술자를 겨우 만나게 된다. 제대로 소독 되지 않은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패혈증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각오하고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에르노는 “내 삶은 오기노 방식과 1프랑짜리 자판기 콘돔 사이에 자리한다”는 걸 깨닫는다. 오기노 방식이란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 오기노가 제안한, 생리 주기에 따른 배란일 계산법을 말한다. 임신 중지의 경험은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한 여성의 생각이 박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함께 사랑과 쾌락을 나눈 남자는 유유히 사라지고, 임신에 대한 비웃음과 호기심 흘리는 눈빛, 하지만 여대생이라는 말에 그나마 달라지는 눈빛의 교차를 지속적으로 당하며, 그는 자신의 몸과 임신, 낙태를 둘러싸고 뒤얽혀 있는 계급과 권력, 가부장제의 모순을 간파한다.

<사건>은 민음사 창립 50돌 기념으로 2016년 첫 책을 낸 ‘쏜살 문고’ 시리즈가 준비한 ‘여성 문학 컬렉션’ 중 한권이다. 함께 나온 6권 가운데는 ‘무민 시리즈’의 작가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 <두 손 가벼운 여행>, 한국 문학으로 강경애의 <소금>, 박완서의 <이별의 김포공항>,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 등도 포함돼 있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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