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8 06:01
수정 : 2019.11.08 15:26
“장애인이기에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에 장애인이 된다”
우생학과 단종수술 대중화한 미국 등 역사 파헤치고 화두 던져
장애학의 도전
김도현 지음/오월의봄·2만2000원
심한 빈혈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면서, 집밖을 나서면 ‘휠체어와 유모차의 길’을 따라다녔다. 동네 카페 중에 휠체어 이용이 가능한 곳이 어딘지 그제야 눈여겨봤고 뒤늦게 단골이 됐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상버스를 이용하려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약속시간보다 한참 먼저 출발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조바심이 났다.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초록색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정상속도’로 다니지 못하는 것이 장애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오래 전 목격했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이 떠올랐다. 빚진 심정이 됐다.
<장애학의 도전>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서온 김도현 노들장애야학 교사이자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가 쓴 책이다. 과격하기는커녕 어투는 조분조분 친절하고 유머마저 느껴지는데, 읽노라면 누군가 뒤통수라도 후려치는 듯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다. 휠체어와 유모차의 길을 걸으면서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든다, 그러므로 장애인차별은 자신의 삶을 옥죄고 스스로를 배제하는 행위’라며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예비장애인’이라거나 ‘장애인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는 장애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해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실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모든 차별문제의 본질은 차별받는 몸이 아니라 차별하는 사회에 있다. ‘너도 그런 몸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어떤 몸이든 차별받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런 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이, 그런 몸이 아닌 네게 더욱 이롭다’는 말에 이미 위계와 차별이 내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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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이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물. 선천성 질환이나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하루 지출되는 5.5 마르크가 건강한 일가족의 하루치 생활비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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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물론 서구사회에도 ‘장애인’이라는 말은 없었다. 팔다리가 불편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다른 이들보다 발달이 늦은 사람들은 늘 있었지만, 이들을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니 ‘나머지’가 하나로 묶였다. 백인을 기준으로 ‘유색인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다.
장애인은 어떤 기능이 ‘손상’된 사람을 뜻한다. 일정한 손상을 지닌 사람들은 ‘버스를 탈 수 없음’, ‘책을 읽을 수 없음’, ‘의사소통할 수 없음’, ‘자립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한다. 하지만 장애는 손상된 몸 때문이 아니라 ‘정상성’의 기준을 두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사회 때문에 생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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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1일을 기준으로 단종법을 통과시킨 미국의 28개 주(빗금)와 통과 예정인 7개 주(검은색)를 보여주는 지도.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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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과 배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우생학일 것이다. 나치가 우생학에 기반한 생체실험을 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나치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자손의 예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37만 5천명을 대상으로 단종수술을 했고, 티(T)-4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장애인 안락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7만 273회의 ‘살균’으로 독일제국 예산을 절감하고 고기와 소시지 낭비를 막았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저자는 “우생학과 단종수술이 대중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나라는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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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록펠러. 오월의 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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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생학은 독과점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의 지원 아래 눈부시게 발전했다. 1910년에 설립된 우생학기록보관소는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의 지원으로 설립됐고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연구소와 석유왕 존 록펠러의 록펠러재단이 차례로 후원했다. ‘씨리얼 왕’ 존 켈로그는 2011년에 ‘인종개량재단’이라는 더 노골적인 이름의 재단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1974년 단종법이 폐지될 때까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만 6만 5천여명의 장애인이 강제로 단종수술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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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네기. 오월의 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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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살아 숨쉬는 복지국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웨덴은 1922년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라는 우생학 연구기관을 정부 차원에서 설립하고 단종법을 입안했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도 뒤따랐다. “보편적 복지국가가 ‘모두 함께 기여하고 모두가 함께 누린다’는 원칙 하에서 운영된다고 할 때, 기여하지 못하면서 누리는 자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인식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에 세계를 휩쓴 우생학은 1940~50년대 들어 ‘인류유전학’이나 ‘의료유전학’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본인이 우생주의자임을 감출 생각도 없는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했다. 1970년대부터는 가장 각광받는 과학분야가 됐다. 요즘은 안락사나 강제 단종수술 대신 장애인 탄생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산모의 산전검사와 선별적 낙태가 허용된다. 신자유주의와 공모한 우생주의는 개인의 ‘능력자본’을 키워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부추겼다. “앞으로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유전자 서비스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저자는 예견한다.
역사적으로 장애는 ‘예방’, ‘격리’, ‘제거’, ‘되돌리기’의 대상이었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장애를 다루는 대표적인 학문인 의학,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재활치료학은 장애를 예방하고,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분리해서 교육하거나 관리하고, 장애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새로운 시각과 비전을 가진 ‘장애학’을 제안한다. 장애학은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관한 학문”이며 “장애를 만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학문”이다. “세상의 가장 변방에서, 인류가 한번도 본 적 없으나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를 향해 오늘도 한 발짝 딛는” 도전적이고 끈질긴 학문이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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