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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8 06:01 수정 : 2019.11.08 20:37

뿌리깊은 의료계 젠더 편견과 무지 밝힌 차별 건강 보고서
조사대상 제외시키고 ‘히스테리’ 퉁친 의료 역사 낱낱이 고발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 옮김, 윤정원 감수

한문화·2만7000원

만약 전립선암 연구를 여성만 대상으로 실시했다면 어땠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치거나 “미친 짓”이란 격한 반응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의학계에선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1960년대 초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는 폐경기가 오기 전까지는 여성이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이 낮다’는 사실을 관찰한 연구자들은 여성 호르몬 치료법이 심장질환에 효과적인지 연구했다. 이 연구에는 남성 8341명과 여성 0명이 참여했다. 국립보건원이 지원한 록펠러대학교의 시범 연구 프로젝트는 ‘비만이 유방암과 자궁암에 미치는 영향’이었는데, 연구 대상에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

여성은 종종 임상연구 전 과정에서 배제된다. 여성을 대상으로 호르몬 치료의 임상연구를 처음 실시한 건 1991년이 지나서였다. 과학자들은 실험대상으로 남성 세포와 수컷 동물을 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의학이 연구해 온 기준 역시 ‘70㎏의 백인 남성’이었다. 여성 호르몬의 상태와 주기가 남성과 다르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된다.

여기 47살 남성과 56살 여성이 있다. 두 사람은 심장질환을 앓을 가능성도, 위험요인도 동일하다. 모두 가슴 통증, 숨이 찬 증상, 불규칙한 심장박동 등 전형적인 심장마비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남성에겐 가정의와 내과 전문의 230명 중 56%가 심장질환을 진단한 데 견줘 여성에게 같은 질환을 진단한 의사는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환자가 최근 스트레스를 받았고 불안에 시달린다’는 메모가 포함되자 진단이 성별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이 메모가 달리지 않았을 때, 의사들의 권고안은 성별에 따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여성의 증상이 우울, 불안, 스트레스 탓으로 취급받는 문화와 무관치 않다. 심지어 의사들은 때때로 월경통, 폐경, 임신 등 여성의 정상적인 생리적 상태와 주기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여성 환자의 말을 의사는 믿지 않는다. 서구의학은 수백여년 동안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여성의 병적 증상을 ‘히스테리’라는 진단명에 모두 포함시켰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의 저자 마야 뒤센베리는 의료기관을 차별의 공간으로 만드는 두 가지 요소를 이렇게 꼽는다. 두 간극이 상호작용하면서 진료실은 여성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교차하는 공간이 됐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처지가 달라져 응급실에서 복통 치료를 받기까지 남성은 평균 49분이 걸리지만 여성은 평균 65분을 기다려야 한다. 여성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질환은 여전히 의학계에서 ‘진짜’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만성피로증후군이나 섬유근육통, 화학물질 과민증이 대표적이다.

여성단체 회원들이 4월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제는 이런 무지와 불신이 환자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다는 것이다. 2000년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심장마비 증상으로 미국 응급실 10곳에 실려 온 수천명의 환자 기록을 분석해 오진 때문에 퇴원당한 환자의 특징을 살펴봤는데, 55살 이하의 여성은 다른 환자들에 견줘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7배나 높았다. 집으로 돌아간 환자의 사망률은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두배나 높았다. 의료계의 무지, 배제, 차별은 결과적으로 여성이 더 오래 살지만 남성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올해 4월 낙태죄 존폐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의료인들의 교육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성의 몸에 더 안전한 임신중절술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의대 교육과정에선 낡은 소파술만을 배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한, 임신중지를 위한 약물도 한국에선 정식 수입되지 않는다. 여성의 건강을 위한 더 나은 선택지가 배제된 현실에서 여성은 가짜약을 구입하거나 낡은 기술에 의존해야 한다. 저자는 의료계에서 무의식적으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젠더 편향 문제를 각종 연구와 인터뷰, 실제 환자의 사례를 통해 가시화하고 이를 기록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진단은 단지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의학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시작점이다. 저자가 당부하는 메시지는 명징하다. “여성의 말을 믿어라.”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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