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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5 05:00 수정 : 2019.11.15 20:42

미국 명문 사립고 다니는 ‘신엘리트’ 특권층 젊은이들의 초상
노숙자·최고위층 모두 편안하게 만나는 ‘공정사회 능력자’ 변모

특권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 강예은 옮김/후마니타스·2만원

아버지는 파키스탄의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으로 건너와 외과 의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아버지는 미국의 중산층 표식을 하나둘씩 갖추기 시작했다. 뉴욕주의 시골 동네에서 보스턴의 부유한 동네로 이사하고 고급 레스토랑을 드나들며 유럽 여행을 다녔다. 그중 가장 눈부신 성공의 징표는 아들을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세인트폴에 보낸 것이다. 세인트폴의 연간 학비는 4만 달러, 한 학생당 기부금은 100만 달러에 달한다. 1855년 설립 이래 미국의 정·재계를 주무르는 권력자들을 양산해 온 이 학교의 내부 동향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릴 정도로 전 국민의 관심사이며, 우리나라 재벌들도 이 학교를 선호한다. 한화가의 아들 김동관·김동원, 효성그룹 조현준 회장, 그리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아들도 이 학교 출신이다. 이민자 출신 아버지는 아들의 입학식을 보면서, 능력만 있으면 미국 사회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을 목격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은 학창시절 내내 ‘불평등’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된다.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세인트폴의 연간 학비는 4만 달러, 한 학생당 기부금은 100만 달러에 달한다. 1855년 설립 이래 미국의 정·재계를 주무르는 권력자들을 양산해 온 이 학교의 내부 동향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릴 정도로 전 국민의 관심사이며, 우리나라 재벌들도 이 학교를 선호한다. 세인트폴 누리집 갈무리

<특권>은 이 아들이 미국의 엘리트층이 어떻게 길러지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의 본질이 무엇인지 폭로하는 책이다. 세인트폴 학생 출신인 지은이는 이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한 뒤 세인트폴 교사로 부임해 학생과 교사, 행정직원 등을 심층 인터뷰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돌아온 세인트폴은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지은이가 학생 시절이었을 때 이곳의 주류는 상류층 자제들이었고 그들은 특권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배경과 가문을 드러내길 즐겼고, 그들끼리만 어울리며 노력과 능력으로 이곳에 온 중산층 자식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10년 만에 돌아온 세인트폴에서 그런 특권의식은 ‘왕따’의 지름길이었다. 지금의 세인트폴 교육은 특권의식을 잘 배우지 못한 질 낮은 태도로 취급했고, 대신 자신의 배경과 가문, 재력에서 나온 특권과 기회를 철저히 능력과 노력의 산물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의 30%가 하버드, 브라운, 예일, 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고 80%가 전국 상위 30위권 대학에 진학한다. 이곳의 졸업장은 막강한 인맥과 세련된 문화, 세속적 성공으로 철저히 치환되는데, 이런 성취는 결코 행운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의 산물임을 끊임없이 프레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엘리트 교육은 능력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평등한 성취를 누릴 수 있으며 ‘사다리’의 가장 윗자리까지 갈 수 있다는 미국식 능력주의의 전시장이 되고 있었다.

세인트폴 학교 티셔츠.

세인트폴 학교 운동복.

능력주의와 함께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특권층의 핵심적 태도는 거의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도 안정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희랍 고전을 읽을 때도 영화 <죠스>를 볼 때도,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도 힙합을 들을 때도 자연스럽다. 최고급 양복을 입고 스테이크를 썰면서 최고위층과 대화를 나눌 때도, 노숙자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게 되더라도 여유 있고 어색하지 않은 태도를 익힌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열린 자세, 자유로우면서도 우아함, 여유로움, 유창함, 노련함 등을 포괄하는 태도인데, 이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배계급의 문화 자본이자 에토스(ethos, 관습)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특권이 체화될 때 이들의 태도와 성취는 기회의 차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재능과 역량 등을 가진 ‘그 사람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미국이 공정한 기회, 평등한 능력주의 사회로 보이도록 만드는 데 일조한다. 문화연구자 엄기호의 해제와 영국의 명문 고교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는 옮긴이의 후기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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