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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5 05:00 수정 : 2019.11.15 20:54

칼 폴라니 최초의 평전…가정환경 및 역사적 배경 통해 거인의 지적 여정 탐구
모순과 실패까지 기록하며 신자유주의 시대 빛나는 대안으로 떠오른 이유 조명

칼 폴라니-왼편의 삶
개러스 데일 지음, 황성원 옮김/마농지·2만9000원

칼 폴라니(1886~1964)의 대표작 <거대한 전환>을 읽다 보면 그 웅숭깊은 통찰에 감탄하면서도 단일한 색깔로 정의할 수 없는 독창적인 지평을 열어나가는 폴라니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토록 복합적이고 통섭적인 사고에 이르렀을까?

폴라니 전문 연구자인 개러스 데일 런던 브루넬대 교수가 쓴 <칼 폴라니: 왼편의 삶>은 그 해답을 폴라니의 탄생과 가정환경, 그리고 격동의 시대를 함께했던 친구들, 사상적 동지들과의 교유에서 찾는다.

부다페스트 대학 시절의 칼 폴라니(가운데). 왼쪽은 친구 레오 포퍼, 오른쪽은 동생 마이클 폴라니. 마농지 제공

폴라니는 스스로 “부모님은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상류층 유대인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헝가리 지주 가문 출신으로 “터널을 비롯한 철도 시설물을 짓는”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였다. 폴라니는 아버지를 “뼛속 깊이 서구화되어” 자식들을 “영국식 교육”으로 이끈 사람으로 묘사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탈무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랍비 학자의 딸로서 폴라니를 나로디즘(1860~7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칼 폴라니와 <거대한 전환> 표지. 마농지 제공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배경과 급진주의에 친숙한 가정환경은 훗날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을 휩쓸 때조차 폴라니가 단독자로서 자신만의 사상을 개척해 나가는 토대가 된다. 지은이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인텔리겐치아” 계급에 속한 폴라니의 삶은 모순과 회의로 가득차 있었다. “폴라니는 볼셰비즘을 경멸하면서도 볼셰비키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통설을 거부하는 사회민주주의자였고, (…) 인간의 품위를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실제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휴머니스트였지만, 러시아의 스탈린 체제를 변함없이 옹호했다. (…) 그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기독교도였고, 고대 세계 연구에 몰두한 근대인이었으며,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대도시권에서만 살았으면서 소작농 조직을 열렬히 지지했다.”

숱한 모순적 순간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었다. 1914년 동지들과 함께 급진부르주아당을 만들자마자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 “헝가리의 애국자로서 참전을 시민의 의무로” 여긴 폴라니는 장교로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전쟁의 끔찍한 경험은 “대학살을 자행하도록 설계된 사회공학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경악하고, 전쟁을 숭고함과는 반대되는, 다시 말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말하게 했다. 티푸스 확진 판정을 받고 부다페스트의 가족에게 돌아가기까지 그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성서에 집착한다.

폴라니는 어쩌면 평생 ‘햄릿형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늘 중간에 끼어 있었다. 사회학자들은 그를 경제학자라고 생각했고, 경제학자들은 사회학자라고 생각했다. 변호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생의 상당 기간 언론인이었고, 미국에 망명하고 나서는 교수로 살았다. 혁명과 전쟁, 파시즘과 홀로코스트가 세상을 물들일 때 그는 결정론으로 달려간 친구 죄르지 루카치와 달리 확신을 경계하며 회의를 거듭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베른슈타인이 맞설 때 그는 베른슈타인 편에 섰다. 1920년대에는 소련식 계획경제와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시장자유주의(나중에 하이에크가 계승)에 모두 반대하며 제3의 길을 지지했고, 죽기 직전에는 서구와 소련의 화합을 주창하는 <공존>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말년의 칼 폴라니. 마농지 제공

최초의 폴라니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폴라니라는 거인의 지적 여정에 대한 탐구이지만, 그의 주장을 미화하거나 일방적으로 떠받들지 않는다. 숱한 모순과 예측 실패를 있는 그대로 적는다. “폴라니는 오랫동안 ‘시장’이 모든 산업화한 경제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았고 결국 자신과 같은 제도주의적 접근법이 ‘자연히 주목받고’ 주류의 경제 분석은 기가 꺾이리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영국 노동당 각료들이 취임했을 때 신중한 선택을 통해 사회주의적 전환으로 귀결될 정책을 수행할 거라는 환상을” 품었지만, “사민주의는 전후 몇십 년간 시장이 거대한 생활 영역들을 내부 식민화로 몰고 가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를 불안정 고용 상태로 만들어 상당한 확장을 달성한 체제를 다시 안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칼 폴라니. 마농지 제공

그런데도 칼 폴라니의 이름은 21세기 들어 더 자주 불려 나오고 “더 환하게 빛난다.” 그의 유명세는 자본주의를 ‘사탄의 맷돌’이라고 일갈한 명쾌함에 상당 부분 기인하지만, 경제란 원래 사회에 “묻어 들어 있는(embedded)” 것이라는 발견과, 노동과 자연(토지)의 상품화에 대한 강직한 반대, “비시장 수단으로 경제조직을 급격히 확대해야 한다”는 대안적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장화에 수반되는 도덕의 타락과 사회 혼란에 대한 혐오가 넘치지만 시장 체제를 해체할 프로젝트들은 패기가 없고, 사민당들은 오래전에 붉은 깃발을 내다 버렸다. (…) 칼 폴라니의 유산은 바로 비시장 유토피아를 옹호하는 행동 속에 살아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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