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9 04:59
수정 : 2019.11.29 20:11
철학자 진태원 “1980년대 말 이후 수입된 유럽 철학은 미국서 변형·가공된 것”
푸코·데리다·지제크·바디우 저작 일별하며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현상’ 극복 모색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진태원 지음/그린비·2만5000원
시뮬라크르, 노마드, 리좀, 파놉티콘, 거대서사의 종언….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담론을 소개하며 국내 지식인들이 애용했던 개념들이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등 프랑스 철학자들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를 통틀어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달고 국내에 수입돼 유행처럼 번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감벤 같은 사상가를 언급하지 않으면 논의에 끼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가 국내 지식 사회에 생겼다.
철학자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학문적 식민주의의 전형’이자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현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사유의 전거로 작용하는 여러 사상가들은, 그가 프랑스 사상가든, 이탈리아 사상가든, 독일 사상가든 간에, 미국이라는 생산과 유통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게 되었다”며 “미국에서 변형되고 가공되고 재조립된 ‘미국제 담론’을 ‘프랑스제 담론’ ‘이탈리아제 담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논문 인용 지수를 산출하는 ‘에스에스시아이(SSCI·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 ‘에이앤에이치시아이(A&HCI·예술 및 인문학 논문인용색인)’처럼 “미국의 일개 민간 학술 데이터베이스 회사에서 운영하는 색인 목록”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점점 더 큰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 미국 의존도가 깊어지고 있다고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의 예로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 등 프랑스 철학자들이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불리는 현상을 든다. 프랑스에서는 리오타르를 제외하면 누구도 이런 명칭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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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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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제 담론이냐 프랑스제 담론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수입된 이론이 국내에서 새로운 학문적 활로를 찾는 데 기여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짐작하듯이, 현실은 부정적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의 포스트 담론에 관한 논의에서 실제로 의미 있고 독창적인 작업을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 담론은 주로 상투어구의 반복, 짜깁기, 획일화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책은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등의 저작과 사상을 곱씹으면서 이들의 국내 수용 과정으로 비판을 이어간다. 이들 세 명을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가”라고 분류하고, “좌파 메시아주의는 포스트 담론들의 핵심적인 문제제기를 봉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상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체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지제크와 바디우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파리, 베를린, 뉴욕 등을 돌아다니며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했을 정도로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제시하는 사상가들”인데, 대중문화의 화려한 인용이나 농담을 늘어놓을 뿐 실질적인 방법론이 없는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고 이들의 작업을 비판한다. 국내에서 이 사상가들을 열광적으로 수용하는 독자들이 “대개 넓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인 지향을 보이는 이들”인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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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슬라보이 지제크, 알랭 바디우. 그린비 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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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프로이트가 1917년 발표한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애도와 우울증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대상의 상실과 관련된 두 가지 반응”이라며, ‘애도’는 자신에게서 영원히 떠나간 대상을 향한 슬픔의 감정이지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단순히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우울증이라는 병리적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고 소개한다. 이어서 1980년대 말 사회주의 몰락 이후 ‘포스트 담론’이 사회주의를 ‘애도’했다면, 좌파 진영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비유한다.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중·민족담론을 이미 죽은 대상, 사라진 타자로 애도했을 때, (…) 이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이를 추구하던 정치권력을 비판적으로 견제하는 대신 이러한 쟁점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민중사나 민족문학, 더 넓게는 민족주의적 담론을 추구하던 이들이 포스트 담론을 배격하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을 때, 여기에는 일종의 우울증적인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 애도의 필요성을 부정한 채 더는 효력을 상실한, 따라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론적 전제들을 맹목적으로 붙든 채로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데리다나 푸코 등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내재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이른바 ‘포스트 담론’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며, 일방적인 ‘애도’와 체념적인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포스트 담론’에 적극 개입해, 변화하는 세계와 대중에 말을 건넸어야 했던 주체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이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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