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9 06:00
수정 : 2019.11.29 09:17
키스의 지수
헬렌 호앙 지음, 황소연 옮김/시공사(2019)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장르 문학에서 로맨스 소설은 인기는 있되 인정은 적다. 상업적으로 너른 독자층을 확보했지만, 독자적인 플롯을 펼치기 어렵고 비평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수동적 여성상, 이성애 중심으로 정의되는 정상성, 강압적 연애 행동에 대해 질문이 새롭게 제기되는 시대, 남녀 연애에 초점을 맞추는 로맨스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성주의적 시각에 눈뜬 독자들에게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작가도 갈등하긴 마찬가지이다.
<키스의 지수>를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출판사 마케팅 직원들도 이 점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표지 하단에 가장 크게 적힌 “록산 게이가 추천한 최고의 로맨스 소설”이라고 쓰인 광고 문구이다. 이 말에는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가 한국의 로맨스 독자들에게도 익숙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 페미니스트도 불편하지 않을 로맨스 소설이 있다는 묵시적인 홍보인 셈이다.
<키스의 지수>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계량경제학자인 스텔라 레인과 ‘에스코트 서비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마이클 라슨을 둘러싼 연애 관계를 그린 소설이다. 영화 <프리티 우먼>의 설정을 남녀 반전한 것으로 보인다. 스텔라는 자신의 증세 때문에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그를 연습하기 위해 데이트 서비스 사이트에서 다니엘 헤니를 닮은 마이클을 지목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섹스와 대인관계에 대해서 가르쳐줄 것을 의뢰한다. 물론 로맨스 소설답게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관능적인 묘사와 심리적 서술이 섬세한 이 소설에는 특별한 점과 전형적인 점이 혼재해 있다. 아스퍼거가 있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약점과 강점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진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은 소설의 개성이다. 또, 경제적 차이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을 일반적 로맨스 소설과 다르게 뒤집었다. 여성이 고객이고 남성이 파는 입장이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사랑, 남성 가족의 인정을 받고 그들과 동화되는 과정, 사랑을 통해서 성숙하는 인간 등은 전형적 로맨스의 서사 요소이다.
<키스의 지수>가 여성주의자가 불편 없이 읽을 수 있는 로맨스 소설인지 질문하는 건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건 로맨스 장르 자체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데렐라적 신분상승에 대한 반발을 느낀 현대 로맨스는 여성에게 또 다른 유의 타협을 제시한다. 여자는 자신의 성공과 돈에 위협받는 남자들과의 갈등을 자기를 낮춤으로써 해소해야 한다. 무엇보다 일상적 불안조차도 사라지지 않는 사회에서 데이트 서비스로 안전하고 도덕적인 선이 있으며 재능도 뛰어난 남자를 만난다는 건 비현실적 행운이다. <키스의 지수>는 배려 있는 연애물이지만, 역시 로맨스는 모든 장르 중에서도 가장 판타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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