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부터 스페인 포데모스까지 150년 역사 한눈에 정리
“리버럴과 좌파정당 구분하고 청년세대는 사회변화 핵심으로 성장해야”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
장석준 지음/서해문집·3만원
“출판사에서 뽑아준 부제가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인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사는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먼저 실천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요. 부담스러운 좌파 이론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 쉽게 대입해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랍니다. 앞으로 펼쳐갈 ‘우리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던 많은 이들의 상태가 한꺼번에 나빠진 것 같은 2019년 말, 5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양장본의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가 나왔다. 이런 때일수록 긴요한 책이다. 지은이 장석준(48)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책의 초안이 되는 원고를 20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이 발간하던 월간 <이론과 실천>에 연재하던 ‘세계 진보정당운동사’가 모태가 됐다. 2000년 초, 당시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이고 “관념 수준에서 이론들을 추상 같은 공식처럼 떠받들던 유풍이 남아 있었”던 때다. 중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그에게 이론 공부를 시켜달라는 요청도 많았지만, 그는 권위있는 이론가들의 명제를 무작정 좇기보다는 역사 현장 속에서의 논쟁과 고민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활동하던 무렵으로부터 100년도 더 흘러 지금은 지구 위 거의 모든 나라가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론 학습보다는 진보정당의 ‘얼굴’을 보여주고 도전과 실패, 그리고 반격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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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이 인터뷰에 앞서 책을 들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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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50년 전 비스마르크 정권의 ‘사회주의자 탄압법’ 아래 지하로 숨어든 독일 사회민주당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주요 활동가들은 죄다 술집 주인이 되었고 공장 주변 선술집에서 노동자들은 맥주를 마시다 누군가 호주머니에서 비합법 출판물을 꺼내기라도 하면 즉석 정치토론을 벌였다. 그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까지, 21세기의 실험들까지 책은 총 4부로 나뉜다. 최초의 진보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 이탈리아 사회당과 공산당, 스웨덴 사회민주당, 칠레 사회당·공산당과 아옌데 인민연합정부, 영국 노동당의 벤좌파운동, 일본 사회당, 브라질 노동자당, 스페인 포데모스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좌파 정당들은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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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창당 주역들. 가운데는 카를 마르크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페르디난드 라살, 카를 빌헬름 藍케.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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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놓고 논쟁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의원단에서 활동한 알렉세이 바다예프, 옥중수고를 쓴 안토니오 그람시, 미국사회당의 유진 뎁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이끈 오토 바우어 등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그가 첫손에 꼽는 사람은 프랑스 좌파의 사표인 장 조레스다. 레닌은 그를 두고 “애매한 말의 구사자” “소부르주아 이념가”라고 혹평했지만 그는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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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부르주아 정치인에서 프랑스 진보정당의 상징이 된 장 조레스.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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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레스는 1885년 총선에서 26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개혁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사회주의자가 된다. 1913년 대규모 연합 집회장 15만 군중 앞에 선 그는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이 내적으로 통합되고 또한 자연과 화합하는 화해와 융합,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조레스는 150년 진보정당 역사 속에서도 드문 인물입니다. 이론가이면서 대중적인 정치가였던 그는 대중정치 언어 속에 고차원적인 고민을 녹여내고 프랑스의 구체적 민주주의 전통과 연결된 이론을 전개했어요. 그의 개혁주의는 ‘혁명적 개혁주의’라 불렸죠. 저 역시 그에 가까운 입장입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고들 하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측면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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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5월5일(러시아력으로는 4월22일)자로 발행된 <프라우다> 창간호.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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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토대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원들(1897년). 앞줄 오른쪽 첫째가 유리 마르토프, 둘째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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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진보정당의 흥망성쇠를 검토한 장 위원은 무엇보다 “보수세력에 끌려다니다가 지지층한테 끝내 외면당하고 무력하게 붕괴한 일본 사회당의 경우 한국의 진보정당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사례”라고 했다. 남미 칠레의 경우는 민주세력이 집권했지만 한국처럼 헌법을 바꾸지 못해 민주화가 불철저하게 진행된 사례다. 민주노동당이 한때 롤 모델 삼았던 브라질 노동자당은 2002년 집권했지만 지금은 파시스트에 가까운 인물이 대통령이 돼 있다.
장 위원은 “진보정당 없이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했다. “민중이 스스로 결정하는 삶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기업과 관료기구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좌파정당만 한 무기는 아직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세계사적으로도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적 국면이 바뀌는 시기다. 특히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의 집권, 스페인 포데모스의 급성장,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버니 샌더스 바람을 관통하는 ‘청년세대’에 그는 주목했다. “2020년대가 정치적으로 대단히 급변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의 진보는 새 세대를 전면에 내세워 전체 판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세대가 사회변화의 핵심 세력이 되려면 다른 집단을 결합해 연합(블록)을 구성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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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15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분노한 자들’ 시위. 플래카드에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이라고 적혀 있다. ⓒOlmo Cal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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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경우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분노한 자들’ 운동이 출발인데, 그 후 세력화하면서 지지 기반을 넓혔죠. 상대적으로 더 급진적인 노총을 결합시키기도 하고 바르셀로나의 경우 주택문제에 적극 참여한 사회운동가 아다 콜라우를 시장으로 당선시키기도 하고 일부는 페미니즘 이슈로 연합하기도 하고요. ‘분노한 자들’을 중핵으로 연합이 형성된 겁니다.”
장 의원은 “리버럴과 진보 또는 좌파를 구분해서 쓰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확하게 리버럴 정당이고, 왼쪽은 진보정당 또는 좌파정당”이라는 얘기다.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그는 정의당의 현재에 대해 안타까움이 커 보였다. “여론조사를 하면 정의당의 지지율은 이른바 ‘조국 사태’ 이전의 지지율을 회복했지만, 지금의 정치지형에서 정의당은 지대수익을 누리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기존 거대 정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인 일정한 지지라는 것이다. 장 위원은 “‘촛불’ 이후 사회개혁의 범위가 명확히 드러났으므로 정의당은 자기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촛불 연합’은 가을을 계기로 쪼개졌습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죠. 서초동에서 촛불을 든 분들은 검찰개혁이 가장 시급하다 보았지만, 광화문은 물론이고 서초동에도 가지 않은 분들이 가장 시급하다 본 것은 부동산, 교육, 사모펀드 문제였습니다. 두 집단은 상당히 다른 집단입니다. 후자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사회세력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 정의당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겁게 자기비판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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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산당의 1932년 총선 포스터. “이 체제를 끝장내자”라고 씌어 있다.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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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위원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내는 쪽으로 ‘진보정당사’의 끝을 맺는다. 그것은 “녹색사회국가-평화공동체를 건설해나가는 진보정당운동”의 기반이 될 근본이념으로서 “민주적-생태적 사회주의 지향”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베이스로 한 사회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의 세 꼭짓점이 되는 길을, 그동안 지나온 수많은 길들 속에 열어가자는 게 책의 핵심 메시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부인과 딸과 함께 사는 일상에서 페미니즘과 좌파 이론이 충돌할 때 그는 어느 편에 설까?
“페미니즘과 충돌하는 좌파라면 그 내용이 문제겠죠. 사회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이 꼭짓점을 이뤄야 하니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충돌한다면요?) 음, 일단 충돌이 확인되면 실시간으로 빠르게 재구성, 수정을…. 하하. 일단 가사노동, 육아를 열심히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책 쓰는 데 시간이 걸린 측면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국면마다 들을 만한 이야기를 내놓는 좌파 이론가’로 본인이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훌륭한 이론가들이 앞서 먼저 가시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가기도 했다”며 “책 앞에 진보정당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간 모든 분께 책을 바친다고 썼다”고 덧붙였다. 이재영, 조승범, 박은지, 박홍구, 이해삼, 배정학, 오재영, 노회찬. 특히 최근 노회찬 의원에 대한 책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단지 그의 이야기를 비극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그가 남긴 풍성한 이야기들을 소중한 자산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분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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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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