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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3 05:59 수정 : 2019.12.13 09:22

기자·변호사 구성된 진실탐사그룹 ‘셜록’ 3년 취재
사법 농단 궤적 ‘재판 거래’ 피해자들 목소리 쫓아

거래된 정의-양승태 사법부가 바꾼 인생들
이명선·박상규·박성철 지음/후마니타스·1만8000원

가난한 형편 탓에 중학교를 중퇴한 뒤 제주와 일본을 오가며 노동자로 일했던 오재선씨는 1986년 4월 갑자기 경찰서에 끌려갔다. 45일간 경찰 9명에게 고막까지 터지는 심한 고문을 당한 뒤 간첩 누명을 쓰고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제주 출신 강희철씨도 1986년 갑자기 경찰에 체포돼 105일간 지독한 고문 끝에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인 김동휘, 최연숙, 이원이, 장영식 씨 등도 고문을 받고서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으로 조작돼 무기징역, 징역 10년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이들을 간첩이라고 판결했던 여섯 판결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판사 양승태다.

김주중씨의 죽음에 대해 쌍용자동차 김득중 지부장은 “회사가 해고자 복직 시기라도 알려 줬다면, 두 아들의 아버지인 김주중 조합원이 목숨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용성

오재선씨는 재판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폭로했지만, 양 판사는 “어떻게 맞았냐” 같은 고문 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강희철씨에게는 휴식 시간에 경찰에 고문을 당했는지 슬쩍 물었지만 강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05일간의 고문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양 판사가 뭔가 눈치채길 기대했지만 기대는 무너졌다. 몇 줄도 안 되는 판에 박힌 시나리오 같은 판결은 사람의 생애와 가족의 미래를 파멸시켰다. 이들은 훗날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거래된 정의>는 사법 권력자들의 농단을 폭로하는 책이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지난 3년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과거의 기록과 판결문까지 모조리 입수해 썼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법원의 ‘역주행’ 판결로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다. 국정원이 2013년 7월 인혁당 피해자 77명에 대해 가족별로 동시에 부당이득 반환 청구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이들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고 2008년 1심에서 인용된 손해배상금의 65%를 가지급 받았지만 배상금 이자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사법부는 ‘채권자’로 돌변한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연간 연체이자를 20%나 물리는 등 유가족이 반환해야 할 돈은 배상액을 넘기기까지 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통장도 압류됐다. 분납 요청도 묵살되어 어떤 이는 은행 빚을 내기도 하고 선산을 잡히기도 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제 모델인 정원섭씨 사건도 책에 등장한다. 그는 1972년 춘천 강간·살인 조작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지만 조작이었다. 재심을 청구해 대법원이 2011년 무죄판결을 확정했고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26억원을 지급하라고 한 1심 판결이 2심에서 뒤집혔다.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소송을 해야 하는데 열흘이 지났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의가 바로잡힌 재심 사건이나 과거사 사건의 경우 이처럼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가능 기간을 기존의 3년이 아닌, 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고 뜬금없이 못박아 버린 것이 바로 양승태 사법부였다.

책은 그밖에도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 판결의 파기환송 이후 마지막 길을 홀로 간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씨와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자 이를 비관해 세상을 떠난 케이티엑스 승무원,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뒤집는 바람에 2년 만에 간암으로 별세한 전교조 빨치산 추모제 사건의 고 김형근 교사 등 사법농단의 전말과 보통 사람들의 수난을 다뤘다. ‘재판 거래’ ‘재심 사건’ 사법 피해자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였다. ‘사법개혁’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는 까닭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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