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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0 06:01 수정 : 2019.12.20 20:06

‘등단 20년’ 시인 김민정 네번째 시집
이태 동안 8명의 문인을 떠나 보내며
“그들 스케줄 따라 그들의 뼈대로 살아”

‘문인들의 제사장’ 노릇하면서도
특유의 유머와 직설 여전히 곳곳에
“시는 말씀으로부터 미끄러지는 것”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지음/문학과지성사·9000원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은 시인 김민정의 네번째 시집은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걸 보고 야하다고 느꼈다면, 그건 당신 머릿속이 ‘그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밖에…. 시인의 본심은, ‘거기’로 떠나보낸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또 얼마 안 가 다시 만날 거니까, 헤어지는 중이라고 말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이태 사이에 8명의 지인을 ‘거기’로 떠나보냈고, ‘여기’ 있는 시인은 또 유능한 문학 편집자(난다 대표)여서, 떠나간 그들이 남긴 말을 모아 유고집을 엮었다. “그들의 스케줄에 따라 그들의 뼈대로 살았어요.” 시는 두 편밖에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말쯤 이 제목이 “왔다”. “우리는 다 헤어지는 사람들이잖아요. 돌아서면 어제가 되는 사람들. 이 제목으로 시집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고, 무당 굿 하듯이 그냥 쏟아졌어요, 11월16일부터 18일 삼일 동안 하루 두세 시간 자면서 소설 쓰듯이 썼어요.”

모든 시에 ‘곡두’라는 화두를 부제 삼아 번호를 매겼다. 곡두는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 무덤에 함께 묻던 ‘토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내 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수경의 점 점 점’) 지난해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그의 세 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고 보내온 리뷰에 대해 그는 “그래주니 대낮에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요……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어…… (중략) 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중략) 밤새도록 여린 짐승 하나가 창밖에서 서성거리기에 성냥에 불을 붙였는데 커져서는…… 번져서는…… 더는 쓸 수가 없겠다 언니야…… 침침해서……”(같은 시)라고 답한다. 떠난 사람들은 그에게 불현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200여 권의 시집을 엮어낸 편집자 김민정은 자연스레 문인들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윤달생을 통해 주검이 오가면 탈이 없고 좋습니다”(‘모르긴 몰라도’)

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삶을 지켜보고 있고, 우리는 죽음과 뒤엉켜 살아간다. 하지만 이 시집이 ‘만가’나 ‘엘레지’로 가득하다고 속단하면 안 된다. 죽음에게 여 보란 듯 유쾌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어릴 적 옆집 아줌마가 혼자 떡국 먹다가 세상을 떠난 사연을 담은 시에서도 유머 본능은 죽지 않는다. “포인트는 사발이 아니고 상여고 소창인데 두 필 사서 그 한 필은 황현산 선생님 1주기 추모식 때 밟고들 들어오시라고 2층에서 입구까지 층층 나무 계단 물 흘리듯 깔았고 남은 한 필은 옷장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결혼한답시고 함 띠로 두를 것도 아니고 애 있어 기저귀 오릴 것도 아니고 행주로나 들들 박아야지 하는데 (…) 그치 그 흰 사발, 리틀엔젤스예술단 어린이합창단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캐럴 부를 때 쓰던 모자 같은 그 흰 사발, 뒤집혀 있어서 뒤집혀 있음으로 이날 입때껏 살아 있나 그거 뒤집을 작심에 그거 뒤집어 떡국 담아 먹을 욕심에 사들인 흰 사발이 얼마 전 부엌 찬장 세 칸을 넘겼다는 얘기지.”(‘사발이 떴어’)

김민정 시인의 네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표지 “색깔은 덜 익은 감색”이다. 시가 덜 익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김 시인은 말했다.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시인의 몸을 통과하면 시가 되고 유머가 된다. 시인이 얼마나 유머를 사랑하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 “웃긴 걸 좋아하는 나. 웃긴 사람을 편애하는 나. 누군가 더럽게 웃긴 년이라고 할 때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먹는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친구가 닭집을 개업했을 때 애들은 그런 데 가는 거 아니다 하는데도 시루떡 쪄서 가는 엄마 손 모자라다며 엄마 지갑 들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거길 졸졸 따라간 데는 체인점 홍보대사가 코미디언 엄용수라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였다.”(‘이제니가사람된다’) “담낭 떼느라 수술한 그날부터 먹고 싶은 건 초장뿐이라 편의점에서 그 초장 몰래 사다 몰래 짜 먹다 흰색 시트에 빨간 얼룩 물티슈로 지우다가 더 퍼뜨리던 2018년 4월 첫 주와 둘째 주의 일산백병원 621호 병실 창가 자리. 사물함에 두고 온 네모난 아베다 손거울은 누가 가졌을까. 누군가 버렸을 거야. 테두리 까졌거든.”(‘나의 까짐 덕분이랄까’) “발 걷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비닐장갑 낀 손으로 닭발 먹다 몰래 뽀뽀하던 중년의 주방장과 홀 담당 아가씨가 있어 아 젓가락은 왜 자꾸 떨어지고 지랄일까 딴청 피우듯 말하는 나의 마음, 이 마음.”(‘네 삽이냐? 내 삽이지!’)

곡두 1번 ‘1월 1일 일요일’에서 시인은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건만 끝내 이행하지 못했다.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다 어쩔 것이여 살림 들어먹을 년들”(‘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이라며 ‘양자’ 들이라는 안동 김씨 족보 아재들의 무지렁이 훈계,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어떤 시인이 “나 알죠? 내 시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나를? 내 시를 모른다고?”(‘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같은 폭력을 만나면 절로 욕이 쏟아진다. “졸라 드시는 거죠 찹찹거리면서/ 저 같잖은 말도 말이라고 저 입에다가/ 아귀수육하고 민어 살 뜨고 육전 부치고/ 소갈비 재고 게장 담그고 새우 튀기는/ 엄마는 미쳤어 엄마는 미친 거야”(‘잘 줄은 알고…’)

처음 시를 쓸 때는 시인도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를 쓰려고 앉기만 하면 왜 얻어맞고 그런 시만 쓰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미투 운동 이후 알게 됐다. “현장에 있음을 카메라로 찍듯이 보여주는 것. 제게 주어진 일인 것 같아요. 시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미끄러지는 미끄럼틀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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