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3 06:00
수정 : 2020.01.03 11:39
‘페미니스트 철학자’ 김은주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변화하는 새로운 윤리적 여성 주체” 제안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김은주 지음/에디투스·1만5000원
“페미니즘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일으킬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의 문제를 페미니즘이 ‘치유’해달라는 요구도 부적절하지만, ‘권력 가지기’ 정도로만 끝나는 것도 페미니즘의 위대한 성취와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김은주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페미니스트 철학자”(권김현영)다. 그가 최근 몇년간 해온 연구는 긴급한 시대적 요청과도 관련이 있었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을 ‘페미니즘 제4물결’이라 칭한 그는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접속하고 시위 현장에서 다른 사람(신체)들과 만나 일으키는 ‘정동’(affect)을 통해 서로 정치적으로 연결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활력을 얻고, 싫은 사람과 마주쳤을 때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 같은 이치다. ‘영영 페미니스트’의 운동성 안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발견해온 그였기에 가능한 분석이었다. “정치공동체의 문제와 나의 이야기를 함께 해명하자”는 철학적 제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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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은주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여성 내부에서도 차이나 적대가 아니라 서로 연결하면서 세계를 사랑하는 힘을 갖고 환멸감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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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나빠지기나 하고 나는 술을 먹겠다’는 태도는 아니라는 거죠. ‘그럼에도 나는 세계를 사랑한다’는 ‘아모르 파티’, 더 나빠진 세계에서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철학도였던 그는 석사학위를 받은 뒤 2000년대 초부터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적 사유에 오이디푸스 구조와 가부장제 비판의 맥락을 추가하는 연구를 해왔다. 본격적인 ‘페미니스트 철학’ 저작은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부터였다. 영미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언어로 점철된 서양 철학사 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여성 철학자들을 재발견하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사상을 깊이 있게 다뤘다.
“여자들이여, 이제 혼자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싶었어요. 한국 여자들처럼 공부하는 여자들이 어디에도 없어요. 어머니, 할머니 들의 못 배운 한도 기억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운동 휴식기 때 페미니스트들이 읽으면 힘이 되는 이론을 보여주고도 싶었어요.”
2013년 박사 논문을 크게 보완하고 수정하여 펴낸 책 <여성-되기>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한 ‘여성-되기’의 실천적 의미를 규명해낸 페미니즘 철학서다. “그동안 이 개념을 국내외 학계에서는 간과해왔다”고 그는 지적했다. ‘여성-되기’는 사실 대단히 중요하고 전복적인데, “근대적 인간에서 벗어나는 것”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는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윤리이며 ‘보편’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진다. 책은 협상·투쟁하면서 공존하는 다종한 신체들로 이뤄진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상정한다.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적 구조 등 권력에 저항하는 다양한 차이를 연결하며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여성 정체성’이라고 강조한 브라이도티의 ‘긍정의 윤리학’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페미니즘을 “여성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고 대안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세계관”으로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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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철학자가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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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급격한 변화들이 이상하게 흥미로웠어요. 포켓몬처럼 단숨에 커지고, 20년에 걸쳐 벌어질 일이 단 3년 만에 벌어지고…. 물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들도 나왔지만 그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차별금지법이나 인권교육이 부재한 문제로도 볼 수 있죠. 학자로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한국 페미니즘이 ‘케이 페미니즘’이라며 자신감을 갖고 세계 페미니즘의 동시성을 획득한 점이에요.”
그가 보기에 한국은 경제적·문화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뤘지만 아직 ‘근대’를 제대로 성취하지도, 아직 종료하지도 못했으며 분단 국가로서 복잡한 상황까지 겹쳐 있다. 이런 가운데 ‘페미니즘 해일’이 인 것이다. 그는 “페미니즘이 에스에프(SF)적인 비전을 보여주며 종료하지 못한 근대의 ‘쓰레기’ 같은 문제를 한꺼번에 드러냈다”며 “빨리 치워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페미니즘이 그러나 분노의 정치학, 원한의 정치학, 멜랑콜리의 정치학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아젠다를 선점해서 비전을 제시해야죠. 여성 내부에서도 근대적인 ‘차이’의 문법이나 적대가 아니라 서로 연결하면서 세계를 사랑하는 힘을 갖고 환멸감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백래시’에 대해서도 그는 조심스러운 견해를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여성노동자들이 서둘러 가정으로 복귀했던 것처럼, 통일 등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지정학적 환경이 급변할 때 정말 거대한 반동의 물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경제적, 역사적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만이 엄청난 역사의 백래시를 차단하거나 그 반동에도 밀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책 맨 뒤에 자신이 언급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힘의 정동’을 불어넣는 주문과도 같았다.
“불가능은 사랑 받는 이들이 죽는 것이지/ 사랑은 불멸이기 때문,/ 아니, 그것은 신성―// 불가능은 사랑하는 이들이―죽는 것이지/ 사랑은 생명의 힘을 변화시켜/ 신성으로.”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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