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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6 18:14 수정 : 2020.01.17 09:08

미국 역사학자가 ‘현미경의 시선’으로 탐구한 식민지 수도의 생활사
“과거의 성찰은 흔적 지우기 아니라 공간의 지배자와 타자를 밝혀내는 것”

서울, 권력도시: 일본 식민 지배와 공공 공간의 생활 정치
토드 A. 헨리 지음, 김백영·정준영·이향아·이연경 옮김/산처럼·2만8000원

오랜 세월 사람들의 신발굽에 눌려 반질반질했지만 여전히 탄탄한 몸피를 과시하는 계단이었다. 지난해 12월27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108계단’을 오르며 미국인 역사학자 토드 A. 헨리(49·캘리포니아대학-샌디에이고 역사학과 부교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돌계단은 전몰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경성호국신사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일본 우익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집회를 하려면 여기 경성호국신사 터가 딱 맞다고 생각한다. 천황이 주도하는 전쟁에 일체감을 가지도록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야말로 일본의 우경화에 항의하는 시위 장소로 적당하지 않은가?”

지난 1년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로 머물다 닷새 뒤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던 그는 계단 초입에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아쉬워하다 조그만 안내 문구를 보고 그나마 반가워했다. 그가 귀국한 뒤 보름이 지나, 일본 식민지배와 공간정치를 다룬 저서 <서울 동화하기>(Assimilating Seoul·2014)의 한국어판 <서울, 권력도시>(산처럼)가 출간됐다.

일본 제국주의 사상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헨리 교수는 식민지배의 실상을 연구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일관된 톱다운(하향식) 통치 행태라기보다는, 조선인들을 황국의 충량한 신민들로 ‘동화’시키려는 지배의 전술로 이해했고, 이 전술이 일상의 물리적 공간에서 어떻게 적용됐는지 관심을 가졌다. 2003년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경성일보> 등 각종 일본어 자료를 훑었고, 도시·건축전문가들과 틈틈이 서울 곳곳을 답사했다. 그의 손끝과 발끝을 거치며 70~100년 전 경성의 역사는 “총독부의 전용 회의실이나 엘리트 저자들의 책상머리”를 떠나 다양한 행위자들의 궤적이 상호교차하는 ‘접촉지대’(contact zone)로 다가왔다.

일제 동화정책이 서울에 남긴 흔적을 연구한 <서울, 권력도시>의 저자 토드 헨리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경성호국신사 진입로였던 서울 용산구 후암동 ‘108계단’에 앉아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공간을 중심에 놓고 연구하면 총독부와 경무청에 복무하던 사람들, 조선의 엘리트·상인·기생·백정·빈민·부랑아들, 한때 40만명에 이르렀던 일본 거류민과 외국인 선교사 등 다양한 국적·성별·계급의 사람들끼리의 교류·갈등 양상을 알 수 있다. 가령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1925년 건립)만 하더라도, 신심을 다해 참배한 일본인도 있었지만 전쟁이 얼른 끝나 ‘일본귀신’을 쫓아내고 교회를 세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개신교도도 있었고, 경성의 유명 관광지를 보려고 오는 시골 사람, 데이트하러 오는 남녀, 방문객들을 상대로 소매치기를 하는 소년도 있었다. 자료·현장 접근의 제한이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 미시사적 접근 방식으로 여러 층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권력관계를 관찰하고 싶었다. 어쩌면 ‘성소수자’이자 ‘유대계 불교도’라는 나 자신의 정체성이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게 된 것 같다.”

벚꽃이 활짝 핀 남산의 경성신사 입구를 담은 사진엽서. 안창모 제공.

그의 ‘현미경적 시선’은 ‘일본인 만들기’ 동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양상을 입체적으로 기술하는 데서 빛을 발한다. 가령 총독부는 신사의 엄숙한 제의를 통해 아마테라스(태양신)에 대한 일본인들의 숭앙심을 보여주려고 했으나, 정작 조선인들을 매혹시킨 것은 화려한 외모의 기생이나 남자의 옷으로 바꿔 입은 게이샤의 행렬이었고, 이처럼 낯선 ‘여흥’에 열광한 일부 조선인들은 ‘크로스 드레싱’으로 화답함으로써 총독부를 당황시켰다. 산업화와 근면의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일제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1915)는 ‘무질서한 우연의 저항’에 부닥치곤 했다. 저자는 전시관 관람 속도가 너무 빨라 물펌프를 보면서 폭포물 놀이시설로 착각한 향촌 유지의 고백, 절도·경범죄 등으로 체포된 방문객의 절반이 일본인이었다는 뜻밖의 난감한 통계를 들이밀고, 여성 관람객이 늘어나면서 박람회장이 자연스럽게 연애시장으로 변하는 광경을 묘사한다.

1914년 도쿄 다이쇼박람회 홍보 포스터(왼쪽)를 본떠 만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홍보 포스터. 일제의 동화주의적 산업의 메시지엔 늘 기생이 등장한다. 기생은 전근대적인 조선의 과거와 근대적인 일본의 현재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존재였다. 산처럼 제공.

총독부가 조선인들의 ‘미개한 위생관념’을 문제삼으며 내놓은 조처도 장벽에 부닥쳤다. 본부를 경무청에 둔 한성위생회는 오물소제 등의 명목으로 매달 위생비(일본인은 8전, 조선인은 2전)를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는 배설물을 농업용 비료로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거름장수들과 경성부 주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위생비를 낼 수 없는 조선인들에게 가한 갖가지 폭정은 공분을 샀다. 총독부가 개최한 위생순회전람회에선 성병에 감염된 여성의 시체를 전시해 논란을 일으켰다. 1937년 이후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황민화 정책은 더욱 촘촘하게 일상을 파고든다. 일제는 신토의 본산인 이세신궁에서 점화해 조선 전국의 신사 경로를 따라 성화를 봉송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관제 언론은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저자의 섬세한 시선은 신문 사진 속 촌로들이 갓도 벗지 않고 그냥 주저앉아 있음을 포착하고, 총독부의 프로파간다와 달리 가식적인 순응의 제스처임을 지적한다.

‘서울, 권력도시’의 저자 토드 헨리 교수가 지난달 27일 남산의 옛 조선신궁 터에 서서 일제강점기 동화정책이 남산 일대에 남긴 흔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는 해방 이후 ‘반일’과 ‘반공’으로 무장한 남한 위정자들의 서울 재편 과정 역시 조선의 전통을 파내고 신민화·근대화의 이념을 새겨넣으려는 총독부의 시도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조선신궁이 해체된 자리에 자신의 동상(28.4m)을 세웠고, 기념일에 맞춰 경복궁에서 브이아이피(VIP) 칵테일 파티 등 여흥을 즐겼다. 박정희가 광화문에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과 직접 한글로 쓴 광화문 현판은 민족주의로 포장한 반공의 재생산에 다름 아니었다. 헨리 교수는 옛 조선총독부 철거-경복궁 복원-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적극적 조명 등은 ‘조선 르네상스’라는 장식을 통해 식민의 참화를 의식적으로 건너뛰려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지배세력의 편집욕과 타자화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 연구자의 역할이다. 과거를 성찰한다는 것은 과거의 흔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즐기고 누렸는지, 그리고 또 누가 쫓겨났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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