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종족주의’ 비판한 첫 책…총독부 간부 “트럭 몰고 순사 동반해 시골서 잡아왔다”
“불편함 넘어 고역스러운 책이지만” 진실을 갉아먹으려는 ‘역사 부정’ 기도 넘어서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판에 실었다가 조선인 탄광 노동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자 사과한 사진이다. <산케이신문>은 이 사진이 “하시마(군함도)가 아닌 후쿠오카현 지쿠호 탄광에서 일본인 광부를 촬영한 사진”이라고 보도했다.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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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허광무·조건·이상호 지음/선인·1만5000원 “암성재상(岩城在祥, 1922년생, 경남 양산군 출신). 1943년 9월20일 홋카이도탄광주식회사 헤이와(平和)탄광 소속 마야치 지갱(地坑)에 동원. 1944년 5월17일 오전 2시경 도주하던 중 적발되어 목재로 앞이마를 얻어맞아 유바리 탄광의 광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오후 9시30분 사망. 함께 도주한 금본선덕(金本仙德, 김선덕)은 붙잡히고 암성혜호(岩城惠鎬, 이혜호)는 격투를 벌이는 사이에 도망. 회사 측은 암성재상의 죽음에 대해 ‘절대로 비밀에 부치고 공표하지 말 것’으로 하고, 붙잡은 김선덕이 진상을 폭로할 우려가 있으므로 경찰서에 유치한 뒤 기회를 보아 북방으로 연행하기로 함.” 홋카이도탄광주식회사 내부 자료 <쟁의관계>에 실린 ‘이입반도에 대한 상해치사사건 발생에 관한 사건’(1944년 5월24일 작성)의 일부다. 암성재상의 한국 이름은 이재상이다. 이재상 등 3명이 탈출했는데, 1명은 맞아 죽고, 1명은 붙잡았으며, 1명은 끝내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회사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동료를 북방으로 보내려고 한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였다면 퇴사하면 될 일인데, 이들은 도주를 택했다. 강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등이 펴낸 <반대를 론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역사왜곡 도서 <반일종족주의>를 반박하며 증거로 제시한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다. <반일종족주의>는 5~7장에서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단기간에 실시했고, 1939년 9월부터 실시한 모집과 관 알선에는 법률적 강제성이 없었다. 조선인 노무동원은 기본적으로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강제동원을 동원 경로에 따라 세분하면서 마치 징용을 강제동원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강제징용과 강제연행도 부인한다. 당시에는 강제징용이라는 말 자체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를 론하다>는 반박의 근거를 주로 일본 당국이나 기업 자료에서 찾는다. 일본 내무성 관리국이 조선에 출장 보낸 직원은 1944년 7월 출장복명서를 통해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밖의 어떤 방식을 통하더라도 출동은 오로지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 이유는 만일 사전에 동원 사실을 알리면 모두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며, 그래서 야습, 유인,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하여 인질처럼 약탈, 납치하는 사례가 많아진다”고 보고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재무국장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는 “트럭을 몰고 순사를 동반해 시골에서 잡아채오는 일”이 있었다고, 1954년 3월6일 대장성 관방조사과에 설치된 금융재정사정연구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반일종족주의>는 이 사진을 책에 싣고 “서경덕 교수가 뉴욕타임스퀘어에서 전광판으로 영화 <군함도>를 광고하는 데 이용한 것, (…) 엎드려 탄 캐는 조선인의 모습이라며 그가 광고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서 교수가 광고판에 실었던 사진과는 다른 사진이다. <반일종족주의>에는 이런 오류가 숱하게 많다.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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