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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1 16:21 수정 : 2005.02.11 16:21

10년만에 시집 ‘말랑말랑한 힘’ 낸 함민복씨

시인 함민복(43)씨가 네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을 묶어 냈다. 앞선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이후 햇수로 10년만이다.

함 시인은 지난 시집을 내기 직전인 1996년 8월 아무런 연고도 없던 강화도 동막리로 들어왔다. 지금 살고 있는,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짜리 폐가가 그의 새 터전이었다.

강화살이 10년 ‘맑고 큰’ 말씀들

“고향(충북 중원군 노은면) 떠나서는 제일 오래 산 동네가 여깁니다. 우연히 놀러 왔다가 마니산이 너무 좋아서 눌러 앉게 되었는데, 이제는 정이 단단히 들었어요. 지금 사는 집을 비워 줘야 하더라도 가까운 데로 옮길 생각이에요.”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그가 강화 살이 10년 동안 몸과 마음을 숙성시켜 걸러낸 맑은 술과도 같은 말씀들의 집이다.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쉽게 만들 것은/아무것도 없다는/물컹물컹한 말씀이다/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소금물 다시 잡으며/반죽을 개고 또 개는/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전문)

그가 뻘에서 캐내어 독자에게 들려주는 말씀인즉 상선약수(上善若水)나 무위이(無爲而) 같은 도가의 가르침과 통하는 어떤 경지를 넘보는 듯하다. 높은 것이 아니라 낮은 것이, 단단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 진짜 힘이라는 이치 말이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말랑말랑한 힘/말랑말랑한 힘”(<뻘> 전문)

삶은 시가 되고, 시는 삶을 안고

체험을 등진 관념과 포즈만으로 이런 경지를 노래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함민복씨의 시들은 ‘강화 사람’으로서 이웃들과 어울려 놀고 일한 결과 빚어낸 것들이라는 점에서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어민 후계자 함현수> 같은 시는 발표 당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이다.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로 시작하는 이 시는 시가 삶 쪽으로 접근하고 삶이 시를 끌어안는 어여쁜 만남의 정경을 그려 보인다. 숭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잡히던 아버지의 시절, 뻘길 십 리를 지게로 숭어를 져 나르던 무렵의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뻘은 지게 진 사람의 발목을 잡아끄는 훼방꾼인 동시에 생의 의욕을 북돋우는 자극제라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게 된다.

“내가 사는 현재는 유년의 그림자”

말랑말랑한 뻘의 이미지와 함께 이번 시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심상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그에게 무엇일까.

“낯선 섬에 들어와 혼자 살다 보니 매일 대면하는 게 길이고 그림자였어요. 자연히 길과 그림자를 노래하는 시들이 많아진 거죠. 대부분은 섬 생활 초기의 작품들이고, 지금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얘기가 많아졌어요.”

시집 뒤에 붙인 산문에서 시인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내 유년의 그림자”라 말한다. 시집 안에서는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죽음의 그림자일 뿐”(<질긴 그림자>)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그렇다면 ‘유년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그림자’ 쪽으로 길게 뻗은 길을 “맨발로/지구를 신고”(<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가고 있는 이가 함민복 시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화/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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