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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6 15:29 수정 : 2005.02.16 15:29

우리 모두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닌다. 어디에 가나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한다. 주민등록증은 한 사람을 ‘합법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안전판이다.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회라는 그물망에 나 있는 빈 구멍이 된다. 그 사람은 터진 그물코와 같다. 사회는 그 사람을 합법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전자 주민증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 저항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의 핵심은 주민등록번호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특정한 번호를 가지고서 살아간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번호들은 일정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어디 주민등록번호뿐인가. 우리에게는 그 외에도 수많은 기호들이 들러붙어 있다. 집집에 일일이 붙어 있는 번지수를 비롯해 무수한 기호들이 한 인간, 한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사회적 삶에 있어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에게 붙어 있는 무수한 수(數)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숱한 숫자들을 외우거나 기록해 놓아야 한다.

이름·자리등 타인의 눈길에 갇혀



그러나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는 기호들이 숫자들만은 아니다. 한 인간이 태어난 장소, 가족의 성을 비롯해 다닌 학교들, 직장, 가입한 집단 … 등 무수한 기호들이 한 인간에게 들러붙어 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떠하든, 사회라는 곳은 그 사람을 그러한 기호들의 집합으로 본다. 숫자의 형태이든 이름의 형태이든, 또는 다른 어떤 형태이든, 한 인간에게 붙어 있는 무수한 기호들의 총집합이 그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바라볼 때, 그 눈길은 언제나 한 인간에게 붙어 있는 기호들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기호들은 종류별로 일정한 체계를 이룬다. 예컨대 땅은 ‘~도’, ‘~군’, ‘~면’, ‘~리’와 같은 기호체계를 이룬다. 기호들은 집합론적 구조에 따라, 또는 가지치기의 구조에 따라 배열된다. 하나의 집합은 그 하위 집합들로 분절되고, 또 각 하위 집합들은 다시 그 이하의 하위 집단들로 분절된다. 기호들의 체계는 이렇게 계속 가지 쳐 나가는 집합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집합관계가 위계(하이어라키)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기호체계는 사물들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땅이나 건물, 신체 같은 사물들에만 기호체계가 들러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담론의 세계, 지식의 세계, 곧 물질적 사물들이 아닌 세계에도 기호체계가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학문의 세계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분절되고, 다시 자연과학은 물리과학과 생명과학, 그리고 다시 물리과학은 물리학, 화학, 지질학 … 등으로 분절된다. 이런 분절은 계속 세분되어 나간다. 담론의 세계 역시 기호체계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위계의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자리를 함축한다. 기호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비물질적 존재이지만, 언제나 물질적 자리와 맞물려 있다. 달리 말해, 우리의 몸과 우리에게 붙어 있는 기호는 맞물려 있다는 뜻이다. ‘과장’이라는 기호/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에 따라 자신의 몸을 회사의 특정한 자리에 두어야 한다. ‘경기도’라는 기호/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국 땅의 경기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몸이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에서의 자리와 우리에게 붙어 있는 기호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이란 결국 이름-자리의 체계를 통해 영위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기호체계는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 왜 우리 모두는 갖가지의 기호체계들 안에서 살아가야 하며, 특정한 이름-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왜 갖가지 숫자들을 몸에 붙이고 살아가야 하며, 왜 특정한 이름을 따기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쳐야 하는가? 왜 늘 이름-자리로 타인을 바라보고 또 자신의 이름-자리를 응시하는 타인의 눈길을 받아야 하는가?

국가·자본주의가 기호체제 지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곧 기호체제로부터 탈주하는 것
이름-자리(位) 없는 인간,
곧 무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국가장치의 자본주의가 쳐 놓은
사다리를 부수어버리는 것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채워날갈 때
삶은 살만한 무엇으로 바뀔 것이다

기호‘체계’는 사실상 기호‘체제’이다. 누구도 기호체계 바깥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기호체계가 거의 강제적으로 우리 삶에 부과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체제인 것이다. 이 기호체제를 부과하는 것은 각종의 권력들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력한 권력은 곧 국가의 권력이다. 모든 기호체제는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 우리가 국가와 국가 사이를 오갈 때 유난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란 통합의 장치이다. 다원성을 통합해서 일관된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국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반드시 기호체제를 필요로 한다. 진시황을 이끌어 중국을 통일한 명재상 이사가 통일제국 수립 후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화폐, 도량형, 문자 … 등을 통일시킨 것이었다. 통합을 그 본질로 하는 국가장치는 기호체제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를 떠받치는 비밀은 총칼을 든 군인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마치 자연법칙처럼 그냥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호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국가의 이런 본성은 근대 프로이센의 철학자 헤겔의 생각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시민사회’는 욕망과 다원성의 세계이다. 그곳은 이기심과 갈등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국가는 욕망을 이성으로, 다원성을 통합으로 다스리는 빛이다. ‘국가이성’이 시민사회를 길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 장치는 교육이다. 이런 교육 이념은 베를린대학으로부터 도쿄제국대학교, 경성제국대학교 …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학의 이념으로 작동해 왔다.

기호체제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사람들을 길들이고 관리한다. 기호체제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을 관리하고, 이름-자리들을 복잡하게 조직으로써 사람들의 삶 자체를 정교한 기호적 그물망 속에 가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직접 가해지는 위해에 대해서는 저항하지만, 자신의 삶을 옥죄고 있는 기호체제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것에 스스로를 맞추면서 살아간다.

기호체제는 ‘출세’의 체제이기도 하다. 한고조 유방은 20등급으로 나뉜 복잡한 작위를 만들어 사람들을 관리했다. 제정 시대 러시아는 14등급으로 나뉜 출세 길을 만들어 젊은 두뇌들을 관리했다. 사람들은 이 많은 등급의 사다리를 하나씩 타고 오르는데 인생을 낭비하기에 그 외의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모든 인간들이 출세의 사다리 타기 놀이에 몰두하는 사이에 권력은 안정되게 국가를 통치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기호체제는 국가권력이 사람들이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사다리이다.

신분상승 욕망의 사다리 부수면…

오늘날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과장들은 부장이 되기 위해 살고, 중령들은 대령이 되기 위해 살고, 시간강사들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 산다. 모든 인간들이 사다리의 바로 위 가로장에 발을 디디기 위해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각박하게 살아간다.

전통적인 신분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자 돈이 곧 이름-자리를 대변하게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거의 없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제 돈을 쫓아서 인생을 살아간다. 돈을 버는 것이 곧 이름-자리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돈이 삶의 모든 의미를 관리하는 사회가 되었다. 기존의 국가장치들과 자본주의의 화폐회로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사다리를 구성하고 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곧 기호체제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름-자리(위·位) 없는 인간, 곧 무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기호체제의 그물을 찢고 빈 공간을 살아가는 것, 숲속의 빈터에서 살아가는 것, 국가장치와 자본주의가 쳐 놓은 사다리를 부수어버리는 것. 물론 우리는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할 수 없다. 세계가 완벽하게 기호체제로 식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자리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이름-자리에 대한 자기 자신의 집착을 털어버릴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가 강요하는 기호체제에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무위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기호체제로부터 탈주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의 여기저기를 채워나갈 때, 기호체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깨워 나갈 때, 우리의 삶은 조금은 더 살만한 무엇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인간은 이미 죽은 인간이다.

이정우/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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