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
땅이름/충주 |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쳐들어온 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에서 엿볼 수 있다. 앞뒤로 보아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만든 이 빗돌을 보면, 고려(高麗)의 ‘큰임금인 할아버지 임금’이 “신라와는 대대로 형과 동생처럼 지내라. 위아래가 서로 어울려 하늘을 지키라”고 하였으며, 신라 임금을 ‘동이 매금’(東夷 寐錦)으로 적었다. 울진 봉평비에도 법흥왕을 ‘매금’으로 불렀다. ‘매금’은 얕본 말이 아니었으며, 법흥왕 이전까지 불린 ‘마립간/마수간’과 같은 말로 보인다.
같은해 12월23일 갑인일에 신라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이끌고 ‘벌성’(伐城)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다. 벌성은 빗돌이 자리잡은 충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리서를 보면, 충주(忠州)는 고구려때 국원성·미을성·탁장성(國原城·未乙省·託長城), 진흥왕때 ‘작은 서울’(小京)이었다. 문무왕때 성을 쌓았으며, 경덕왕때 중원경, 고려때부터 충주로 불렸다. 충주의 옛이름은 ‘불’(國)을 비추어볼 때 ‘불골’이었다. 앞서 ‘벌성’은 ‘벌골’로 비슷하다. 이로 보면 ‘未乙省’(미을성)이 아니고 ‘朱乙省’(주을성)인 듯하다. 요즘의 ‘붉다’라는 말로 볼 때 ‘불골’은 요즘의 ‘붉을’로 재해석되어 ‘주을성’으로 적은 듯하다.
신라와 외교를 맡은 사람은 태자 ‘공’(共)으로 ‘태고추가’라고도 하였다. 장수왕의 태자이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조다’로 보기도 한다. 충주로 오는 길에 ‘고모루성/여모루성’(古牟婁城)을 지나는데 표기상 ‘얄모로’인 화천으로 보인다.
사서에서도 고구려는 자주 ‘고리/고려/구려’(高麗·高驪·句麗)로 썼다. 뒤의 ‘고려’는 고구려의 연장에서 나라이름을 그리 지은 것이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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