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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7 15:56 수정 : 2005.02.17 15:56

만화영화 ‘바리공주’ 의 캐릭터. 미농미디어 제공

버림받은 바리,
저승에서 찾은 슈퍼파워

‘친자봉사’ 집착하는 불라국왕
일곱번째 딸을 버리는 순간
불치병속에 버려지는데
이는 바로 국가의 질병이라

우리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은 누굴까? 바리공주! 삼척동자도 아는 이름이라고 하면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동자(童子)들은 다 아는 이름이다. 과거와는 달리 근래에는 무속신화도 옛이야기로 새 단장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노소 여성들이 굿판에서 만나던 여신이 이제는 동화의 얼굴로 우리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친숙한 바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제 몸을 던져 죽을병에 걸린 아비를 살려낸 바리공주.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비의 눈을 뜨게 한 심청과 닮았으니 효행을 읽어야 할까? 자아를 포기한 저승여행을 통해 생명의 묘약을 얻어 부모를 살리고 그 공덕으로 신이 된 바리공주. 희생을 통한 성화(聖化)라는 종교적 주제를 그 안에서 포착해야 할까? 긴 저승길을 통해 밥하고 빨래하고 애낳는 여성들의 삶을 여실히 재현하는 바리공주. 굿판의 참례자인 여성들이 바리를 통해 바리데기·소박데기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련히 풀어내니 한풀이(解寃)의 미학을 읽어내야 할까?

바리공주를 만나고 느끼고 이해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수십 종에 이르는 판본만큼이나 다양한 얼굴로 바리는 굿판에서 혹은 독서판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 만날 바리공주는 우리가 그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신이다. 아니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지 못한 바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바리데기>가 가족 이야기, 가족의 확대판인 국가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불라국이라는 가상의 국가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불라국은 그저 저승인 서천서역국에 대립되는 이승의 공간만은 아니다. 나아가 이 가상의 국가가 모종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줄줄이 딸만 태어나는 병이 그것이다. 일곱 번째 딸 바리공주는 그 질병의 극점이다. 반드시 아들을 얻어야 한다고 기자치성(祈子致誠)까지 드렸건만 낳고 보니 말순이 바리데기였으니 말이다.

불라국왕 오귀는 왜 그다지도 아들에 집착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불라국이 답이다. 국가는 권력의 지속을 위해 아들-후계자를 필요로 한다. 신라 경덕왕의 아들에 대한 편집증을 생각해 보라. 오귀대왕과 경덕왕은 쌍둥이다. 국왕에게 아들이란 국가의 지속을 보장하는 둘도 없는 장치인데 그 지속장치에 빨간불이 들어온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귀대왕의 불치병이 시작된다. 고대하던 아들 대신 바리데기가 첫울음을 울자 화를 삭이지 못한 왕은 ‘말순이’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바리데기를 버리자 아버지도 불치병 속에 버려진다. 이런 식으로 <바리데기>는 국가의 질병이라는 문제적 상황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후 <바리데기>는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한다. 만약 이 신화가 국가권력의 기원이나 지속, 혹은 변동을 보여주는 왕권신화였다면 경덕왕 식의 해결책을 시도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속신화 <바리데기>는 아들 낳기가 아니라 버린 딸을 통해 문제해결을 꾀한다. 이 역설적 해결책 안에 <바리데기> 신화의 고갱이가 숨어 있다. 그 해결의 경로를 잠시 따라가 보자.


온 나라 의사가 다 와도 소용이 없자 왕후 길대부인은 옥녀무당을 찾아간다. 한데 무당의 점괘가 얄궂다. 이승의 약은 아무리 써도 소용없다. 반드시 서천서역국 약물을 써야한다! 서천서역국이라니? <바리데기>를 비롯한 우리 무속신화에서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는 저승의 한 공간이 아닌가. 다시 말해 서천서역국은 불라국의 바깥, 현실의 바깥에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약물은 국가의 외부에 있다.

바깥에 존재하기는 바리데기도 마찬가지다. 바리데기는 ‘또 딸’이라는 이유로 불라국이라는 국가사회에서 쫓겨난다. 오산 무녀 배경재의 구연본(口演本)을 보면 바리는 옥함에 넣어져 강물에 유기된다. 옥함이 흘러 흘러 닿은 곳이 태양서촌이고 바리는 거기서 바리공덕할머니와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된다. 그렇다면 태양서촌은 서천서역국과 유사한 공간이 아닌가. 바리데기 역시 지금 불라국의 외부에 있다. 이렇게 한 국가사회의 외부자가 된 존재가 역시 그 사회의 외부에 있는 서천서역국 여행을 통해 생명의 약물을 국가사회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 국가의 서사로 읽는 <바리데기>의 흥미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생명의 약물에다 이들 삼형제
아비를 구하고 윤리를 되살리고
무당들의 조상신을 자청하니
바리데기는 한풀이 굿판을 넘어
외부를 지향하는 신화중 신화로다

그런데 좀더 주목해야할 대목은 소생한 오귀대왕 앞에 정작 구원자 바리데기가 불효자식이니 죽여 달라고 엎드리는 장면이다. 약물을 구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약수지킴이 동수자를 만나 아들 삼형제를 낳았으니 죄가 크다는 것이다. 죽었던 왕이 소생하자 국가적 사회의 윤리도 되살아나고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윤리야말로 오귀대왕의 불치병을 초래한 주범이 아니었던가. 아들에 대한 집착과 아버지의 허혼(見) 윤리는 동전의 앞뒷면이 아닌가. 죽음에서 소생하자마자 다시 불치병의 바이러스가 코앞에 닥친 셈이다.

▲ 바리공주는 무속인들의 기구(祈求) 대상이기도 했다. 사진은 19세기에 그려진 바리공주. <무신도>(열화당·1989)에서 발췌.
그러나 <바리데기>식 치료법의 특징은 지독한 효녀 바리데기를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오귀대왕과 불라국의 윤리가 오귀대왕의 입을 통해 부정된다는 데 있다. 못된 년이라고 자책하는 딸에게 “야야 그런 말 마르라. 친손봉사는 못할망정 외손봉사는 못하겠나? 아들 삼형제는 어디 있다 말이고? 야야 듣던 말 중 반가운 일이로구나.”(김복순 구연본)하고 왕은 위로한다. 이런 왕의 태도는 친손봉사(親孫奉祀), 다시 말해 아들을 통한 왕위계승을 고집하던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혹시 아들에 대한 편집증이 딸의 아들을 통한 외손봉사로 변형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의 눈초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조 이후에 강화되고, 17세기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거의 절대화된 친손봉사의 윤리가 여성들에게 가한 억압을 생각해 보라. 그런 억압 속에 있던 굿판의 여성 참례자들에게 오귀대왕의 태도 변화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적 국가사회의 질병이 외손봉사의 담론을 통해 교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재발의 가능성을 미연에 제어하는 <바리데기> 식 치료법의 한 특징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속신화 <바리데기>가 무조신(巫祖神)의 ‘본풀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 바리데기는 무당들의 조상신이 되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바리데기의 저승여행이 무당이 접신(接神) 상태에서 체험하는 천상·지하 여행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라는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 바리데기 자신이 신화 속에서 무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당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힘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다른 힘이란 무당에게 지핀 신의 힘이겠지만 다른 말로 하면 자연에 내재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내림굿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었지만 원시사회에서 입무자(入巫者)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자연의 내밀한 힘과 접촉하는 신비체험을 한 후 그 힘을 가지고 사회로 돌아와 무당이 되는 것이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무당이 대장장이와 동일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대장장이가 철광석을 제련하여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자연의 무한한 힘을 사회 내부로 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데기가 불라국의 바깥에서 치병의 힘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이런 무당의 치병 원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슈퍼 파워를 사회의 치유에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무당은 현실의 망령에 사로잡힌다. 흔히 무당왕(Shaman King)으로 불리는 고대국가의 왕이 그런 존재들이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국가사회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들어온다. 신은 왕에 종속되고 왕 자신이 신성한 존재가 된다. 바리데기를 버린 불라국 오귀대왕은 바로 저 신성왕(神聖王)의 종국적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오귀대왕이 아니다. 바리데기는 국가 체제 내부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저승에서 돌아와 제 일을 다한 바리데기는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뜻도 마다하고 재물도 마다하고 무조신이 되기를 자청한다. 다시 국가사회의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이런 선택은 현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긴장감이 넘치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왜냐고? 굿을 통해,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해 일상적 현실에 개입해 들어오는 바리데기가 저 국가의 외부에 있음으로써 불라국으로 표상되는 국가적 사회의 현실과 길항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손봉사’에 집착한다면 국왕은 언제든 불치병에 걸릴 수 있다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가?

근래 <살아있는 우리신화>(한겨레신문사)를 펴낸 저자는 <바리데기>를 두고 ‘이것이 신화다’라는 표현을 썼다.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바리데기>의 한풀이 미학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오늘 우리가 새로 만난 바리, 국가 체제의 외부를 지향하는 바리데기, 이것이야말로 신화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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