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바리공주’ 의 캐릭터. 미농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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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찾은 슈퍼파워 ‘친자봉사’ 집착하는 불라국왕
일곱번째 딸을 버리는 순간
불치병속에 버려지는데
이는 바로 국가의 질병이라 우리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은 누굴까? 바리공주! 삼척동자도 아는 이름이라고 하면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동자(童子)들은 다 아는 이름이다. 과거와는 달리 근래에는 무속신화도 옛이야기로 새 단장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노소 여성들이 굿판에서 만나던 여신이 이제는 동화의 얼굴로 우리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친숙한 바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제 몸을 던져 죽을병에 걸린 아비를 살려낸 바리공주.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비의 눈을 뜨게 한 심청과 닮았으니 효행을 읽어야 할까? 자아를 포기한 저승여행을 통해 생명의 묘약을 얻어 부모를 살리고 그 공덕으로 신이 된 바리공주. 희생을 통한 성화(聖化)라는 종교적 주제를 그 안에서 포착해야 할까? 긴 저승길을 통해 밥하고 빨래하고 애낳는 여성들의 삶을 여실히 재현하는 바리공주. 굿판의 참례자인 여성들이 바리를 통해 바리데기·소박데기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련히 풀어내니 한풀이(解寃)의 미학을 읽어내야 할까? 바리공주를 만나고 느끼고 이해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수십 종에 이르는 판본만큼이나 다양한 얼굴로 바리는 굿판에서 혹은 독서판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 만날 바리공주는 우리가 그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신이다. 아니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지 못한 바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바리데기>가 가족 이야기, 가족의 확대판인 국가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불라국이라는 가상의 국가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불라국은 그저 저승인 서천서역국에 대립되는 이승의 공간만은 아니다. 나아가 이 가상의 국가가 모종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줄줄이 딸만 태어나는 병이 그것이다. 일곱 번째 딸 바리공주는 그 질병의 극점이다. 반드시 아들을 얻어야 한다고 기자치성(祈子致誠)까지 드렸건만 낳고 보니 말순이 바리데기였으니 말이다. 불라국왕 오귀는 왜 그다지도 아들에 집착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불라국이 답이다. 국가는 권력의 지속을 위해 아들-후계자를 필요로 한다. 신라 경덕왕의 아들에 대한 편집증을 생각해 보라. 오귀대왕과 경덕왕은 쌍둥이다. 국왕에게 아들이란 국가의 지속을 보장하는 둘도 없는 장치인데 그 지속장치에 빨간불이 들어온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귀대왕의 불치병이 시작된다. 고대하던 아들 대신 바리데기가 첫울음을 울자 화를 삭이지 못한 왕은 ‘말순이’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바리데기를 버리자 아버지도 불치병 속에 버려진다. 이런 식으로 <바리데기>는 국가의 질병이라는 문제적 상황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후 <바리데기>는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한다. 만약 이 신화가 국가권력의 기원이나 지속, 혹은 변동을 보여주는 왕권신화였다면 경덕왕 식의 해결책을 시도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속신화 <바리데기>는 아들 낳기가 아니라 버린 딸을 통해 문제해결을 꾀한다. 이 역설적 해결책 안에 <바리데기> 신화의 고갱이가 숨어 있다. 그 해결의 경로를 잠시 따라가 보자.
온 나라 의사가 다 와도 소용이 없자 왕후 길대부인은 옥녀무당을 찾아간다. 한데 무당의 점괘가 얄궂다. 이승의 약은 아무리 써도 소용없다. 반드시 서천서역국 약물을 써야한다! 서천서역국이라니? <바리데기>를 비롯한 우리 무속신화에서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는 저승의 한 공간이 아닌가. 다시 말해 서천서역국은 불라국의 바깥, 현실의 바깥에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약물은 국가의 외부에 있다. 바깥에 존재하기는 바리데기도 마찬가지다. 바리데기는 ‘또 딸’이라는 이유로 불라국이라는 국가사회에서 쫓겨난다. 오산 무녀 배경재의 구연본(口演本)을 보면 바리는 옥함에 넣어져 강물에 유기된다. 옥함이 흘러 흘러 닿은 곳이 태양서촌이고 바리는 거기서 바리공덕할머니와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된다. 그렇다면 태양서촌은 서천서역국과 유사한 공간이 아닌가. 바리데기 역시 지금 불라국의 외부에 있다. 이렇게 한 국가사회의 외부자가 된 존재가 역시 그 사회의 외부에 있는 서천서역국 여행을 통해 생명의 약물을 국가사회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 국가의 서사로 읽는 <바리데기>의 흥미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생명의 약물에다 이들 삼형제
아비를 구하고 윤리를 되살리고
무당들의 조상신을 자청하니
바리데기는 한풀이 굿판을 넘어
외부를 지향하는 신화중 신화로다 그런데 좀더 주목해야할 대목은 소생한 오귀대왕 앞에 정작 구원자 바리데기가 불효자식이니 죽여 달라고 엎드리는 장면이다. 약물을 구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약수지킴이 동수자를 만나 아들 삼형제를 낳았으니 죄가 크다는 것이다. 죽었던 왕이 소생하자 국가적 사회의 윤리도 되살아나고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윤리야말로 오귀대왕의 불치병을 초래한 주범이 아니었던가. 아들에 대한 집착과 아버지의 허혼(見) 윤리는 동전의 앞뒷면이 아닌가. 죽음에서 소생하자마자 다시 불치병의 바이러스가 코앞에 닥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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