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17 19:42 수정 : 2005.02.17 19:42



풍수지리·정감록·민중이 계룡산 택한 까닭은…
‘변혁의 이상향’ 역사적 맥락에서 실증적 연구

계룡산 도사들이 모인다. 계룡산에서 도를 닦는 기인들이 아니라, 계룡산에 대해 훤히 아는 박사급 연구자들이다. 18일부터 이틀간 20여명의 학자들이 계룡산 자락의 공주대학교와 계룡산 갑사를 오가며 학술대회를 연다.

한국역사민속학회와 공주대 사학과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 자리의 화두는 ‘계룡산과 역사민속학’이다. 계룡산을 주제로 삼은 본격 학술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계룡산을 역사학·사회학·종교학·민속학의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들여다보는 ‘공간의 이해’를 지향하고 있다. 근대를 지나 탈근대를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신비와 금지의 공간으로 남겨진 이 지역을 학문적 접근을 통해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 변혁의 이상향=정희정 한남대 강사(국문학)는 “계룡산 일대의 지역설화를 분석하면,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민중들의 열망이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은 그 근저에 놓인 풍수도참사상을 살핀다. 계룡산의 산세와 금강 줄기의 흐름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를 휘감는 ‘산태극 수태극’의 입지는 풍수지리학자들이 꼽는 최고의 이상향이다.

풍수지리의 이상은 새로운 미래의 이상과 만난다.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한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정감록〉의 예언이 그것이다. 이는 핍박받는 민중들의 이상향과 다시 만났다. 진철승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민중을 도탄에 빠뜨린 부패권력의 중심지인 한양에 대한 저항감”이 “이상적 왕조의 수도인 계룡산을 공간적 표상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민중의 절망과 희망으로 표출”했다고 지적한다. 동학혁명군이 2차 봉기 때 계룡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 한국종교의 속살=새나라의 꿈이 스러진 계룡산 자락의 민중은 신흥종교 아래서 안식처를 찾았다. 계룡산은 “한국 근현대 민중들의 종교적 열망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곳이자, 한국 종교의 가장 깊은 내면”(진철승)이다. 오늘날까지 계룡산을 ‘신비화’시키는 핵심장치가 여기에 있다.

1924년 2월, 동학의 한 분파인 시천교도 2천여명이 ‘상제교’로 이름을 바꿔 계룡산으로 이주하면서, 신흥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혼돈에 빠진 종교인들이 다시 계룡산에 몰려들었다. 불교와 도교 등 정통신앙을 뼈대 삼았던 신흥종교에 더해, 말세·재림사상에 근거를 둔 개신교 계통의 신흥종교들이 합세한 것이다. 계룡산 국립공원 추진 당시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1975년까지 104개의 종교교단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제교·태을교·정도교·일심교·관성교 등 신흥종교는 물론, 천주교·장로교·감리교 등 일반 기성종단도 계룡산에 종교시설을 뒀다. 홀로 수행하는 ‘1인 교단’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는 더욱 늘어난다.


◇ 민족사의 풍부한 텍스트=이토록 많은 서사와 상징을 품고 있는 계룡산이지만, 본격적인 학문연구의 대상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었다.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장은 “1994년 몇몇 학자들의 연구를 모은 〈계룡산지〉를 충남도청이 출간한 것을 제외하면, 이 지역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주 회장은 “계룡산의 ‘신비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되지만, 민중의 변혁적 지향과 이념이 담긴 이 지역을 역사적 맥락에서 진지하게 살펴보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행정수도 추진 등으로 다시 한번 세간의 시선이 모이는 이 지역에 대한 본격 연구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내딛고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계룡산 ‘신도안’

▲ 신도안 전경을 찍은 사진. 신도안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이광삼씨가 찍은 사진을 주강현 역사민속학회장이 〈한겨레〉에 제공했다. 모든 사진은 1970년대 전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계룡산 봉우리안 남북 4km·동서 3km 분지
반역의 공간이자 민중 이상향 공간
일제강점뒤 종교취락지…1975년 정비사업

계룡산의 역사는 ‘신도안’(新都內)의 역사다. 하늘의 최고신인 천황대제가 강림한다는 천황봉(天皇峯)을 비롯한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로 둘러싸인 남북 4㎞, 동서 3㎞의 분지가 바로 신도안이다.

이곳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해 공사를 시작한 ‘도읍 후보지’였다. 신도안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태조가 한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1년 만에 공사가 중단됐지만, 이후 〈정감록〉 등을 통해 ‘민중의 이상향’을 표상하는 핵심 공간이 됐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역사교육학)는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전국의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면서도, 은밀하게 신도안 천도를 위한 터닦기 공사를 지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반역의 상징적 공간으로 일종의 ‘봉금’(封禁) 지역이었던 이곳은 결국 일제 강점 이후 종교취락지로 변모했다. 신도안에 정신적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를 거치며 사분오열하는 와중에 ‘탈정치 노선’을 주창한 시천교가 탄생했고, 그 내부에서 다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도들이 1924년 2월13일 신도안으로 이주한 것이다.

〈정감록〉과 동학의 은근한 연관, 일제강점과 민족종교세력의 내분, 그리고 정신적 상징공간으로의 귀향이라는 드라마틱한 과정은 이후 수많은 신흥종교 탄생의 씨앗이 된다. 그 거름은 근현대사의 격랑 가운데서 〈정감록〉의 예언이 바로 이 신도안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믿은 이름없는 필부들이었다.

그러나 1975년 계룡산 국립공원화 사업으로 무허가 암자와 종교건물을 철거하면서 신도안의 쇠락이 시작됐다. 1984년에는 육군 계룡대 설치 사업을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의 분산이주 정책이 실시됐다. 그들과 함께 깃들었던 종교인들도 함께 이곳을 떠나야 했다.

진철승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주정책 실시 당시 “시민아파트와 간척지 우선분양권을 주겠다는 특혜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이주한 신도안 주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계룡산이 내다보이는 인근 마을과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한세기에 걸친 민족의 수난과 민중의 아픔이 빚어낸 세계 개벽에 대한 변함없는 열망” 때문에 신도안에서 새 세상이 펼쳐지는 날을 지켜보겠다는 이유였다.

안수찬 기자



△ (위로부터) ①은 계룡산 신도안에 자리잡은 신흥종교 신자들이 기념일을 자축하며 단체사진을 찍은 모습. ②는 계룡산 기슭에서 수도자들이 염불을 외는 모습. 갓과 도포 차림으로 목탁과 염주를 차린 이들의 모습은 유·불·선 3교를 융합한 신흥 종교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③은 한 신흥종교가 신도안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물들. 기록에 따르면 이날 준비된 제물은 떡시루 99개, 돼지 9900근, 초 9900자루 등이었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