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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0 16:46 수정 : 2005.02.20 16:46

겸재 정선이 노년에 그린 <삼일포>. 드넓은 호수와 꿈틀거리듯 묘사한 주위의 암산과 바위, 소나무 숲의 맑은 기운 등이 어우러진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⑧ 삼일포

동쪽은 동해파도 겹겹 안길듯
서쪽으론 금강연봉 첩첩 절경
신선도 반해 ‘삼일’ 노닐다가
정선 산과 수의 조화 화폭에

금강산 외금강 탐승의 기점인 온정리에서 남동쪽으로 빠져 절세 명승 삼일포를 찾아가는 길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기묘한 답사길 중 하나일 것이다. 동쪽으로 푸근한 구릉과 토산이, 서쪽으로 너른 고성평야 저 멀리 장엄한 외금강 연봉들이 줄줄이 도열해 마치 산하의 사열식을 보는 듯한 감흥이 벅차다. 특히 눈 덮인 겨울에는 깔깔한 산야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니 더욱 장쾌한 파노라마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초 고성 서쪽에서 외금강을 뒤돌아보았던 어당 이상수도 <동행산수기>에 “이 승경은 찬란하기가 마치 기이한 그릇을 벌인 듯하고 울창하기가 마치 기이한 책을 보는 것 같다”고 극찬한 기록을 남겼다. 당대 산수와 어울려 심신을 닦고 기운을 받으려고 금강산을 찾은 선비들은 이 길목에서 산을 멀리 조망하면서 산의 내면에 깃든 이치를 읽곤 했던 것이다.

오늘날 남한관광객들은 온정리에서 남동쪽 길로 가서 삼일포를 찾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옛적 문인들은 거꾸로 내금강을 본 뒤 동남쪽의 외금강 유점사, 백천교를 거친 뒤 다시 남강줄기를 북으로 거슬러 옛 고성읍(현재는 구읍리)을 지난 뒤 삼일포를 답사했다. 이 여정에서 고성읍 거북바위(귀암) 근처의 정자인 해산정을 반드시 유람해 기록을 남기고는 삼일포 가서 노니는 게 정석이었다. 멀리 동해 수평선 보이는 해산정은 조선 후기 농암 김창협의 기록대로 “구릉 너머 보이는 동해 파도가 앉은 자리까지 밀려오는 듯한”절세의 전망과 일출 보기가 유명했다. 진경화풍의 거장 겸재 정선, 그의 문우인 삼연 김창흡 등도 이곳에서 금강연봉과 어우러진 그림과 진경시를 남겼는데, 삼연은 “이 정자 덕분에 동쪽나라에 태어난 것 한스럽지 않네”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정자는 사라졌고, 관광객은 삼일포 능선에서 귀암의 모습만 얼추 볼 수 있을 뿐이다.

36개의 크고 낮은 봉우리에 둘러싸인 삼일포는 신라시대 신선 네 분이 놀러왔다가 경치에 반해 삼일간 머물렀다는 전설로 유명한 자연호수다. 북쪽 기슭 법기봉을 중심으로 36개 연봉들이 구릉 너머 아련한 동해, 그리고 서쪽 금강연봉과 어우러진 선경 중 선경이다. 금강산의 단일 명승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가 전한다는 이 명소를 묘사한 옛 지식인들의 기록은 휘황찬란하다 못해 읽는 이의 눈을 아리게 한다. 금강산광이던 봉래 양사언은 “거울 속에 핀 연꽃송이 서른 여섯개, 하늘가에 솟은 봉우리는 일만이천”이란 명구를 남겼으며 삼연 김창흡은 “마음과 정신이 아주 깨끗해지니 이곳을 떠날 생각이 안 난다. 그래도 갈길 바빠 삼일간 머무를 수 없으니 (삼일을 머무른 신라시대)신선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까지 했다. 명재상 채제공은 행정가답게 호수를 일부 메워 농사를 지으려던 이를 추적해 처벌했다는 관찰사의 보고기록을 전한다. <금강예찬>의 최남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천녀가 떨어뜨린 거울” “이히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온다”고 적었다. 양기 충만한 금강연봉의 절경들을 보다가 아늑하고 다소곳한 삼일포의 여성적 전경 앞에서 문인들은 금강산이 음양이 조화를 이룬 유일한 진산임을 실감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겸재 정선은 소용돌이 선묘 등의 현란한 화법으로 삼일포와 주위 바위산들을 호방하게 묘사한 진경산수화의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삼일포는 맹추위에 절반 정도는 꽁꽁 얼어붙었다. 장군대, 충성각, 연화대 등 호수 서쪽의 전망대에서 북쪽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전경을 보지만 다른 계절보다 아취는 덜한 느낌이다.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옛 고성읍의 귀암, 적벽강(남강), 해금강 등의 절경이 허전함을 메워준다. 사실 요사이 관광객의 삼일포 유람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호수 기슭 법기봉 아래 문암에서 찬란한 동해 일출을 관람하던 옛 선비들의 풍류나 호수를 뱃놀이하며 사선정, 단서암 등의 네 섬과 북쪽 기슭 몽천암터의 옛 새김글씨 등을 감상하던 삼일포 유람의 고갱이는 북쪽의 불허로 즐길 수 없다. 서남쪽 들머리에서 호수전경을 조망하고, 그네들이 지은 단풍각에서 막걸리를 사마시며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다. 새벽녘 일출의 장관을 볼 수도 없으니 시공간적으로 문화유산 삼일포의 인문적 가치를 충실히 즐길 기회는 막힌 셈이다. ‘다시 만나요’란 북한가요를 불러준 북쪽 안내원은 “통일 되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관광객들은 삼일포 진경을 제대로 못누리는 아쉬움을 연화대 정자 서쪽의 눈 덮인 고성평야를 보며 달랬다. 병석에서 ‘내가 죽으면 삼일포의 흰 갈매기가 되리라’고 했던 문인 이상수의 극진한 삼일포 사랑을 후대인들이 몸소 느껴볼 기회는 정녕 언제가 될 것인가.

금강산/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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