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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1 17:59 수정 : 2005.02.21 17:59

홍명희의 〈임꺽정〉 3권 ‘양반편’을 보면, 우리말 ‘대우법’과 계급 차별을 꼬집는 장면이 나온다.

꺽정이가 “존대, 하오, 하게, 해라 말이 모두 몇 가지람. 말이 성가시게 생겨먹었어.” 하고 말의 구별 많은 것을 타박하니 상대방이 어쨌으면 좋겠는지 묻는다.

“말을 한가지만 쓰면 좋을 것 아니오.”

“어른 아이 구별 없이 말을 한가지만 쓰는 데가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이냐?”

“두만강 건너 오랑캐들의 말은 우리말같이 성가시지 않은갑디다. 천왕동이의 말을 들으면 아비가 자식 보고도 해라, 자식이 아비 보고도 해라랍디다.”

“그러니까 오랑캐라지.”

“오랑캐가 어떻소. 그것들도 조선 양반 마찬가지 사람이라오.”

“우리말이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그런 차별이 있는 덕에 세상이 이 모양 아닌가요.”

“그런 차별은 있어 온 지가 오랠세.”

“권세를 손에 쥔 사람이 그런 차별을 없애라고 영을 내리면 오랬다고 없어지지 않을까요?”

“영을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몹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영을 내린다고 그렇게 쉽게도 없어질 것이 아니니.”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여기서, 화살은 ‘대우법’보다 ‘계급’ 차별에 가 닿는다. 계급은 없어졌으나 어른 아이, 아래위를 가려 달리 쓰는 대우법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적절히 부려쓰는 독특한 쓰임이다. 그런데 오랑캐 말인 영어에 층하 구분이 없는 것을 편히 여기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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