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22 18:26 수정 : 2005.02.22 18:26


국익 앞세운 대륙침략논리 현재진행형

1903년 6월 도미즈 히론토 등 도쿄 제국대학 법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 7명의 박사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내각 수상에게 제출했다. 이들은 “전쟁으로 만주를 획득하는 것이 좋다”는 중국분할론을 주장했다. 한국도 일본의 수중에 넣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국의 중립화론이나 만한교환론(만주를 러시아에 주고 일본이 한국을 차지한다는 논리) 모두 반대했다. 일본이 먼저 만주를 점령하면 한국은 힘들이지 않고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개전론에는 전쟁에 대한 ‘새로운 발상법’이 들어있다. 도미즈는 “전쟁에 의해 국가는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나카무라 신고는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전쟁인지 아닌지는 판정할 수 없으며 전쟁은 정해진 룰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다카하시 사쿠에이는 ‘국제자위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일본의 국가존립을 위해서는 인근 국가의 보전을 필요로 하는데, 러시아의 만주점령은 바로 그 인근국가의 보전을 해치는 것이며, 그 결과 일본의 존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는 단순히 일본의 국익을 지킨다는 차원을 넘어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침략의 논리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 러일전쟁 이후 ‘군신’으로 추앙된 히로세 다케오의 동상. 1910년 5얼 일본 도쿄 만세이바시역 앞에 세워졌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제공.

일본국민 대다수가 러일전쟁을 국익을 방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보는 오늘날,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과정에서도 유사한 전쟁논리가 개진되고 있다. 러일전쟁과 뒤이은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잉태한 7박사의 개전론이 과거의 악몽에 그치지 않고, 2005년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일본의 전쟁영웅 만들기의 시초도 러일전쟁에 있다. 일본 최초의 군신(軍神)으로 불리는 히로세 다케오는 러일전쟁의 영웅이었다. 그는 1904년 3월27일 일본해군이 여순항에 거점을 둔 러시아함대를 봉쇄하는 작전을 수행했을 때 행방불명된 부하를 찾기 위해 세 차례나 수색하다가 총탄에 맞아 숨졌다.

당시 일본 언론은 그를 군대의 모범적인 영웅으로 추대하여 ‘군신(軍神)’이라는 칭호까지 붙였다. 그의 장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엄하게 치뤄졌으며 의연금을 모아 동상까지 세웠다. 이듬해에는 그의 전기까지 봉헌됐다. 이후 봉천 남쪽 요양에서 일본 육군의 대공세 때 죽은 또 다른 2명의 군신이 등장했다. 이후 러일전쟁 때 활약했다가 명치천황이 죽은 후에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고 전해지는 노기 마레스케도 군신으로 숭배됐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