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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디지털 기술로 되살린 옛 광화문 현판글씨가 공개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이 현판글씨 영상을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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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한글단체들이 내세우는 ‘광화문’ 현판 고수의 논리들
“‘門化光’? ‘광화문’!”
1916년에 찍은 현판 사진이 디지털 기술로 재현되면서, 광화문 현판 교체를 둘러싼 논란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문화재청은 ‘집자’의 옹색한 복원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있게 “이것이 진짜”라며 당시 사진을 제시함으로써, 덤으로 ‘죽은 박정희’의 그림자에서도 벗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상대는 한나라당이나 보수언론만이 아니었다. 이번 논쟁에서 한번도 주류에 들지 못했지만, 한글 관련단체들은 “‘한글 현판’을 지켜내겠다”며 전의를 불사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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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글단체들 주최로 열린 ‘광화문 한글 현판 지키기 토론회’. 유홍준 문화재청장 등이 초청됐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참말로>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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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4층 회의실에서는 한글 관련단체들이 주최한 ‘광화문 한글 현판 지키기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 주제는 ‘광화문 현판, ‘門化光’이 아닌 ‘광화문’이어야 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정양모 문화재위원장이 한글단체 인사들과 설전을 벌일 거라는 주최 쪽의 예고와 달리 한글단체 인사들만 자리를 메우는 바람에, 토론회는 시작부터 맥이 빠지는 듯했다. 방청석까지 합쳐 수십명에 그친 참석자들의 머리는 대부분 백발이거나 반백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풀죽은 모습은 없었다. 토론회 분위기는 얼핏 결의대회에 가까웠다. 일생을 한글운동에 몸바쳐온 이들에게 광화문 현판은 원형 복원이 필요한 문화재도, 글쓴이의 정치적 상징물도 아니었다. 다만 그 안에 새겨진 표기언어가 유일한 판단기준인 것으로 보였다.
“박정희 현판과 집자 현판 경매하면 어느 게 비쌀까?”
최기호 한국어정보학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만들어 한글을 연구한 경복궁의 정문에 한글정책을 펼쳤던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현판을 붙인 건 당연한 일”이라며 광화문과 한글을 역사적으로 동일시했다. 최 회장은 “만약 박정희 현판과 집자 현판을 놓고 경매를 하면 싸구려 집자는 100만원도 안 가겠지만 박 대통령 것은 몇 억은 갈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과가 여러가지 있지만 한글 언어정책을 앞장선 사람의 글씨이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석득 외솔회 회장은 문화재청의 광화문 현판 교체 시도를 또 하나의 ‘한글파동’으로 규정했다. 그는 한글의 역사를 “겨레의 창조적 슬기 중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건만 태어나면서부터 나라 안팎의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었지만, 이런 운명 속에서도 선각들의 ‘한글의 투쟁’을 통해 발전적인 오늘에 이른 것”으로 설명했다. 그에게 광화문 현판 교체 시도는 이런 도전과 응전의 새로운 고빗길인 셈이었고, 최 회장과 달리 ‘죽은 박정희’의 글씨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 현판이 어떻게 되든 광화문 현판은 반드시 한글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창경궁 창덕궁 현판도 한글로 바꾸자”
이상보 한글재단 이사장에게 광화문 현판 교체 시도는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오는 듯했다. 이 이사장은 “광화문 현판은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한문자에 중독되어 아무런 반성도 없이 써왔던 것을 뒤에 민족적 각성에서 한글로 개선해 놓은 것”이라며 “우리는 올바른 역사의식으로 그런 사대주의적 망상을 깨우쳐 줌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 ‘창경궁’, ‘창덕궁’ 등의 모든 현판도 한글현판으로 바꿔 우리 배달겨레의 자주독립성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로급의 인사와 격려의 말이 끝난 뒤 지정 토론자들의 발제가 뒤를 이었다.
첫번째 토론자로는 독일인으로 한국 국적을 선택한 이참 참스마트 대표가 나섰다. 이참씨는 어느 한국사람보다 한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보였다. 그는 문화 마케팅의 관점에서 광화문 한글 현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외국인에게 한글을 1시간만 가르치면 뜻은 몰라도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한글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가치”라며 “우리 스스로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세계인들이 한국문화를 좋아하게 되고 이를 이용해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바꾸려는 나름의 좋은 이유가 있겠지만 외국인이면 누구나 와서 보는 현판 글을 한자로 바꾸면 우리 문화가 아니라 중국 문화를 홍보하는 꼴이 될 것”이라며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부분도 있지만 해석의 요소도 많은 만큼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바깥쪽 현판은 한글로 하되, 안쪽에 한자 현판 달자” 절충론도
한글단체들의 한글 현판 보존 주장이 ‘박정희 향수’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는 해명성 발제도 있었다. 이봉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은 60년대 대학에서 한글전용운동을 펼치며 경찰의 탄압을 받던 사연과, 한글학자들의 노력이 더해져 68년 청와대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문서는 물론 신문 잡지 등 우리의 모든 글자살이에서 한자를 일절 쓰지 못하게 하는 ‘한글전용 5개년 계획안’을 만들어 발표하게 했던 과정을 되돌아봤다.
이 회장은 “광화문 한글 현판은 박 대통령이 한글을 좋아하거나 자기과시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60년대 한글단체들과 대학생들의 노력으로 박 대통령을 설득시켜서 나온 것”이라며 “다른 운동단체들은 그 독재자를 설득시키지 못 했지만 우리는 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늘날 광화문의 위상은 경복궁의 정문이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상징이고 서울의 상징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며 “우리나라 베이징 특파원들이 천안문 앞에서 현지보도를 할 때 ‘天安門’ 세 글자가 선명히 보이는 걸 보고 그 곳이 중국임을 쉽게 연상하는 이치를 떠올려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또 “광화문의 한글 현판을 양복에 갓 쓴 것처럼 비유하는데,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이 그랬듯이 도포에 중절모를 쓴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며 △광화문 바깥쪽 현판은 한글로 하되, 안쪽에 한자 현판을 달아 경복궁의 다른 건물 한자 현판과 조화를 꾀하는 방법 △한글 현판에 그칠 게 아니라 ‘빛될문’, ‘빛길문’ 같은 순우리말 현판을 다는 방법 △경복궁 내 모든 한자 현판에 한글을 보태 쓰는 방법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발제가 끝나갈 무렵 “우리들은 누구한테서 돈 한푼 받지 않고 외길을 걸어왔는데 마치 박정희를 추앙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 어렵게 만든 한글전용계획안이 위정자들에 의해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초의 한글 광화문 현판도 문화재…한글 현판 역사 살려가야”
‘광화문 현판 다툼’을 국내외 권력의 충돌이 수렴된 문화충돌 현상으로 풀이한 조영환 울진타임즈 발행인도 한글의 우울한 현주소를 강조했다. 조씨는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체제 뒤로 우리 기업들이 모두 외국자본으로 넘어가면서 기업의 이름도 우리말에서 영어 머릿글자로 다 바뀌고 있는 건 상징하는 바가 크다”며 “독재와 민주 같은 낡은 구도 아래 광화문 현판을 바꾸려고 불필요한 싸움을 하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미래의 역학관계에서 제국의 틈바구니에 끼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문화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지정 토론자로 나선 김영환 부경대 철학과 교수는 광화문 현판의 디지털 복원 방침을 겨냥해 문화재의 진품과 재현품의 논리를 내세웠다. 김 교수는 “문화재에서 진품과 재현품(복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며, 그 거리는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광화문 현판을 복원하더라도 상징성은 크겠지만 그 자체로 문화재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고종 때 현판을 쓴 임태영은 270여년 전의 원형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 한자 현판을 쓴 게 당연한 것처럼 68년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한글 현판을 단 것도 자연스런 시대의식을 반영한 것”이라며 “본디 현판이 사라진 상태에서 지금 현판을 또 하나의 원형으로 보지 못할 이유는 없고, 최초의 한글 광화문 현판으로서 뜻깊은 문화재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자 현판을 다시 단다면 막 피어나는 한글 현판의 역사를 단절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것이 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에 독재자라는 정치적 평가를 잣대로 문화재에 손을 댄다면 제대로 남아날 문화재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글단체의 유별난 현판 지키기 노력은 한글 위기의 방증
진용옥 한국어 정보학회 명예회장(경희대 전파공학과 교수)는 자유발언을 통해 “디지털 영상복제 방식은 수동 집자를 대치한 상세 짜깁기로, 디지털 복제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덧칠과 복각이 가해져 복제품을 양산하게 된다”며 “정품 유일 희소성의 가치가 문화재의 생명이라면 디지털 복제는 이미 문화재 복원이 아니고 사이버 위작의 복각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로급 참석자들은 사회자가 토론을 끝마치려 하자 발언권을 요청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뿐 아니라 북핵 문제까지 언급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이날 토론 참석자들은 광화문 한글 현판을 지키기 위해 문화마케팅, 신자유주의, 디지털 등 언뜻 한글운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다양한 이론과 개념까지 동원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유별난 노력은 한 독재자가 쓴 한글 현판의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판단과 논리의 타당성을 떠나 우리 말글살이에서 한글이 처한 위기를 매우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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