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죽은 이를 꽃상여에 실어 보내는 장례식도 이승으로의 귀환을 위한 한 단계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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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원천’ 저승에서 구한 까닭은… 이승의 대립공간 저승
허나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무수한 이승들 사이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라 톨킨이 쓰고 피터 잭슨이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의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이한 공간이다. <반지의 제왕>에 그려진 중간계는 물론 주인공이 잠시 거쳐 가는 통과의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판타지가 펼쳐지는 사건의 공간이지만 영웅 프로도와 그 일행의 반지원정이 이루어지는 중간계는 그 자체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물음도 던진다. 우리 신화의 중간계적 상상력은 어떤 것일까? 우리 신화들을 뒤져보면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라는 수직적 공간 구획이 보인다. 이런 공간 분할은 우리 신화만의 특징은 아니다. 샤머니즘의 세계 인식 안에 존재하는 보편성이다. 그렇다면 천상과 지하의 중간에 있는 지상의 인간세계가 중간계인가? 단지 공간적 위계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간계를 단지 공간적 위계가 아니라 어떤 의례적 위치로 본다면 지상은 그런 공간이 될 수 없다. 비인간계인 천상이나 지하와는 달리 지상은 그저 인간계일 뿐이다.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의례적 위치라고 하는 신화의 중간계란 무엇을 말하는가? 잠시 인류학이 말하는 통과의례를 떠올려 보자. 모든 통과의례는 참례자를 기존의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적인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거쳐야 참례자는 새로운 사회로 통합된다고 한다. 통합 이전의 주변적 상태에서는 일상의 리듬이 정지되고 비일상적 혼돈이 참례자를 감싼다. 의례적 공간이 신비와 금기에 휩싸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유화가 유폐되었던 금와왕의 밀실이나 알이 버려진 짐승들의 공간, 심청이 인당수를 통해 들어간 용궁, 심지어는 대학의 세속화된 사발식 현장도 그런 공간이다. 신화의 다양한 중간계 역시 이같은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하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이런 공간 가운데 중간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우리 신화의 공간은 ‘저승’이다. 우리 신화에서 저승은 그저 망자(亡者)들이 가는 죽음의 세계 혹은 지옥이 아니다. 저승 중간계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 저승을 가장 잘 아는 여신 바리데기를 따라 저승길로 잠시 떠나 보자. 바리데기는 아버지 오귀대왕의 병을 고칠 약물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저승길을 나선다. 바리데기가 아는 것은 약수가 서쪽 삼천 리 서천서역국에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이 기약 없는 서역행에 도우미들이 없을 리 없다. 노인이나 스님, 혹은 할미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도우미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 이들은 그저 친절한 길잡이가 아니라 밭갈기나 빨래하기와 같은 가혹한 노역을 요구하는 시험관들이지만 바리데기가 누군가. 바리데기는 무사히 저승의 입구인 황천강을 건너 저승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승의 생김새다. 동해안의 유명한 무부(巫夫) 김석출이 부른 <바리데기굿> 무가를 들어보면 높은 산을 서너 개 넘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극락 가는 길, 왼쪽은 지옥 가는 길이고, 복판 길로 쭉 가면 서천서역국이라고 노래한다. 서천서역국의 동대산에 약수가 있고 환생(還生)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무속신화가 상상하고 있는 저승은 이처럼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이라는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라대왕이 있는 지옥을 저승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꽤나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저승의 이런 공간 배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간계의 상상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의 배치에서 보자면 서천서역국은 중간 지점이다. 나락(奈落)과 지복(至福)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지대가 바로 서천서역국인 것이다. 물론 서천서역국의 약수나 꽃밭이 극락의 앞마당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판본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판본들이 추인하고 있는 이 공간 배치는 중간계의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생명의 원천은 중간계에 있다는 상징! 그런데 서천서역국이라는 중간지대를 품고 있는 저승은 바리데기가 귀환한 이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더 큰 단위의 중간계로 존재한다. 저승은 이승과 대립된 공간이지만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저승은 무수한 이승들 사이에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왜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는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에 놓인 망자를 위해 해야 할 기도와 중음신의 영혼이 새로 탄생하기 위해 저승의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토록 자세히 안내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교가 저승을 중간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무속신화가 저승을 중간계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바리데기가 고난을 뚫고
생명수를 얻어 이승 귀환하듯
늘 죽어야 산다는
신화의 고갱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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