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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4 16:00 수정 : 2005.02.24 16:00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죽은 이를 꽃상여에 실어 보내는 장례식도 이승으로의 귀환을 위한 한 단계다. <한겨레> 자료사진 \



‘생명의 원천’ 저승에서 구한 까닭은…

이승의 대립공간 저승
허나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무수한 이승들 사이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라

톨킨이 쓰고 피터 잭슨이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의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이한 공간이다. <반지의 제왕>에 그려진 중간계는 물론 주인공이 잠시 거쳐 가는 통과의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판타지가 펼쳐지는 사건의 공간이지만 영웅 프로도와 그 일행의 반지원정이 이루어지는 중간계는 그 자체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물음도 던진다. 우리 신화의 중간계적 상상력은 어떤 것일까?

우리 신화들을 뒤져보면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라는 수직적 공간 구획이 보인다. 이런 공간 분할은 우리 신화만의 특징은 아니다. 샤머니즘의 세계 인식 안에 존재하는 보편성이다. 그렇다면 천상과 지하의 중간에 있는 지상의 인간세계가 중간계인가? 단지 공간적 위계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간계를 단지 공간적 위계가 아니라 어떤 의례적 위치로 본다면 지상은 그런 공간이 될 수 없다. 비인간계인 천상이나 지하와는 달리 지상은 그저 인간계일 뿐이다.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의례적 위치라고 하는 신화의 중간계란 무엇을 말하는가? 잠시 인류학이 말하는 통과의례를 떠올려 보자. 모든 통과의례는 참례자를 기존의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적인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거쳐야 참례자는 새로운 사회로 통합된다고 한다. 통합 이전의 주변적 상태에서는 일상의 리듬이 정지되고 비일상적 혼돈이 참례자를 감싼다. 의례적 공간이 신비와 금기에 휩싸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유화가 유폐되었던 금와왕의 밀실이나 알이 버려진 짐승들의 공간, 심청이 인당수를 통해 들어간 용궁, 심지어는 대학의 세속화된 사발식 현장도 그런 공간이다. 신화의 다양한 중간계 역시 이같은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하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이런 공간 가운데 중간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우리 신화의 공간은 ‘저승’이다. 우리 신화에서 저승은 그저 망자(亡者)들이 가는 죽음의 세계 혹은 지옥이 아니다. 저승 중간계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 저승을 가장 잘 아는 여신 바리데기를 따라 저승길로 잠시 떠나 보자.

바리데기는 아버지 오귀대왕의 병을 고칠 약물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저승길을 나선다. 바리데기가 아는 것은 약수가 서쪽 삼천 리 서천서역국에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이 기약 없는 서역행에 도우미들이 없을 리 없다. 노인이나 스님, 혹은 할미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도우미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 이들은 그저 친절한 길잡이가 아니라 밭갈기나 빨래하기와 같은 가혹한 노역을 요구하는 시험관들이지만 바리데기가 누군가. 바리데기는 무사히 저승의 입구인 황천강을 건너 저승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승의 생김새다. 동해안의 유명한 무부(巫夫) 김석출이 부른 <바리데기굿> 무가를 들어보면 높은 산을 서너 개 넘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극락 가는 길, 왼쪽은 지옥 가는 길이고, 복판 길로 쭉 가면 서천서역국이라고 노래한다. 서천서역국의 동대산에 약수가 있고 환생(還生)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무속신화가 상상하고 있는 저승은 이처럼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이라는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라대왕이 있는 지옥을 저승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꽤나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저승의 이런 공간 배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간계의 상상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극락·서천서역국·지옥의 배치에서 보자면 서천서역국은 중간 지점이다. 나락(奈落)과 지복(至福)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지대가 바로 서천서역국인 것이다. 물론 서천서역국의 약수나 꽃밭이 극락의 앞마당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판본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판본들이 추인하고 있는 이 공간 배치는 중간계의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생명의 원천은 중간계에 있다는 상징!

그런데 서천서역국이라는 중간지대를 품고 있는 저승은 바리데기가 귀환한 이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더 큰 단위의 중간계로 존재한다. 저승은 이승과 대립된 공간이지만 순환적 세계관에서 보면 저승은 무수한 이승들 사이에 놓인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왜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는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에 놓인 망자를 위해 해야 할 기도와 중음신의 영혼이 새로 탄생하기 위해 저승의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토록 자세히 안내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교가 저승을 중간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무속신화가 저승을 중간계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바리데기가 고난을 뚫고
생명수를 얻어 이승 귀환하듯
늘 죽어야 산다는
신화의 고갱이가 아닌가

바리데기는 고난에 찬 중간계의 통과의례를 거쳐 생명수와 환생꽃을 들고 다시 황천강을 건너 이승으로 귀환한다. 바리데기의 이런 희생 덕분에 자식을 버린 아버지 오구대왕은 새 생명을 얻고, 종내는 길대부인과 더불어 천상의 견우직녀성이 된다. 저승길을 거부해 불효를 저지른 언니들과 그 남편들도 하늘의 별이 되고, 동대산 동수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도 삼태성(三台星)이 된다. 이들을 나락에서 지복으로 끌어올린 힘이 중간계의 생명수와 환생꽃, 그리고 스스로 중간계에 들어간 바리데기의 희생에 있었던 것이다.

생명수와 환생꽃이 있는 죽음의 세계-저승. 이 역설이야말로 중간계의 본질이고 신화적 사유의 골간이다. 신화는 늘 죽어야 산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천지만물은 창조신의 주검에서 생겨난 것이고, 인도네시아 세람도의 여신 하이누벨레의 해체된 몸에서는 섬사람들의 주식이 된 여러 종류의 감자들이 열린다. 죽음은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고리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신화적 사유를 함축한 도상(圖像)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 문양에는 언제나 하나의 힘 안에 다른 하나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음 안에 양이, 양 안에 음이 중간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승 중간계가 지닌 이런 신화적 성격은 서양의 대표적 중간계인 연옥과는 다르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 주로 채용하고 있는 연옥은 작은 죄를 저질렀거나 큰 죄를 저지르고도 용서받은 영혼이 죄를 씻고 최후의 심판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대기하는 대합실 같은 곳이다. <연옥의 탄생>을 쓴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서양사에서 연옥은 종말론이 퇴조하고 현세를 긍정하는 낙관적 세계관이 등장한 12세기에 탄생했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까지 먼저 간 영혼들이 거주할 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이런 중간계의 상상력은 이미 고대 종교에 있었다. 아니 샤머니즘 같은 원시종교나 신화에도 있었음을 특기할 필요가 있다.

중세에 탄생한 서양의 연옥이 천국행 대합실이라면 저승은 이승으로 다시 나오기 위한 통과의 장소이다. 연옥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천국이 영원한 생명의 장소라면 저승을 거처 다시 온 이승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생명의 장소이다. 물론 불교에도 카르마(業)를 벗어난 존재가 도달하는 궁극의 장소인 극락이 있지만 극락은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머나먼 서방의 장소일 뿐이다. 믿고 선업을 쌓기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천국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승과 저승을 왕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속과 불교의 저승이 연옥보다는 더 신화적 중간계에 가까운 셈이다.

이쯤에서 또 다른 물음표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바리데기 이야기와 유사한 시베리아의 쿠바이코 신화에서 처녀 쿠바이코는 괴물에게 잘린 오빠의 머리를 되찾아 오기 위해 지하계로 내려간다. 무수한 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한 후 마침내 지하계의 왕 이를레 칸 앞에 선 쿠바이코. 그녀는 이를레 칸이 던진 시험을 통과한 후 오빠의 머리를 찾아 이승으로 돌아와 지하세계에서 가져온 약물로 오빠를 소생시킨다. 그렇다면 쿠바이코가 내려간 지하계는 중간계가 아닌가?

쿠바이코 신화에서 생명의 약물이 존재하는 지하계 역시 중간계임에 틀림없다. 천상·지상·지하의 수직적 공간인식을 가지고 있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지하계가 중간계일 것이다. 우리의 지하국대적퇴치 설화 역시 지하 세계로 잡혀간 공주를 한 영웅이 구출해 오지 않는가. 그러나 불교는 우리 신화의 중간계에 상당한 변형을 가져왔다. 지하에서 저승으로의 이동이 그것이다. 수직적 위계에 있던 중간계를 수평적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동한 것은 위치일 뿐이다. 무속신화가 간직하고 있던 지하 중간계의 신화적 본질은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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