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이번에 목포대 정병준 교수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발굴한 영국정부의 지도는 획기적이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사실상 좌지우지한 주축국이다. 지도는 영국이 샌프란시스코평화협정을 앞두고 미국과는 별도로 3차에 걸친 검토 끝에 최종 확정해 1951년 4월7일, 미국에 통고한 대일평화협상안에 첨부돼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로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이 지도는 1951년 2월 28일에 제1차로 마련된 영국측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와 제주도까지 일본령으로 포함돼 있다가 수정된 자료라는 점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지도에 대해 오랫동안 독도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백충현(66) 서울대 명예교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백 교수는 "이 지도가 아니라 해도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너무나 많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무엇이기에 저네들(미국과 영국)이 마음대로 독도를 넣었다 뺐다 하느냐"는 불만도 토로했다. 백 교수 지적처럼 독도가 한국령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 지도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 예컨대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 지령(SCAPIN.스캐핀) 677호에 첨부된 지도와1950년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준비하면서 활용한 지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해 1949년 이래 10여 차례 이상 초안을 작성했으나 단 한 번도 영토문제를 다룬 공식지도를 작성한 바 없다. 나아가 1949년 맥아더의 주일정치고문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의 로비를 기점으로 독도는 일본령, 혹은 미언급 상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1951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담 평화협정 초안을 마련하면서공식지도를 제작했다. 이번에 발굴된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명백하게 배제되어 있고, 이는 곧 독도가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지도가 갖는 의미를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이는 샌프란시스코회담 과정에서 제작된 유일한 영국정부의 공식 지도였다. 둘째, 이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 그 이전 평화회담 초안에서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기록했다가, 한국령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정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지도의 행방과 관련해 이상한 대목이 있다. 정 교수에 의하면 일본의 독도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일본 국회도서관의 즈카토모 다카시는 분명히 이 지도를 보았음에도 공개를 하지 않았다. 즉, 즈카토모는 1994년에 발표한 '평화조약과 다케시마(竹島.독도)'라는 논문 말미 구석에다가영국초안의 지도를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존 포스터 덜레스 파일'에서참고했다고 조그맣게 써 놓고 있다. 하지만 즈카토모는 일본의 이익에 불리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이 지도를 지금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영국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1차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제주도와 울릉도까지 일본땅에 포함시켰을까? 그 비밀의 일단은 정 교수가 이번 지도와 함께 공개한 1946-47년에 일본정부가작성해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 정부에 돌린 팸플릿에서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즉, 일본 외무성은 패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벌써 일본이 확보해야 할 도서(島嶼.island)와 소도(小島.islet)ㆍ암초(rocks)에 대한 각종 팸플릿을 '일본본토에 인접한 소도서(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들 팸플릿 중 제4부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까지 자국영토가 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정부는 애초에 이들 팸플릿 등을 통해얻은 정보를 토대로 초안을 작성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그렇던 영국정부가 과연 어떤 통로를 통해 무슨 정보를 얻었기에 2차 초안 이후 미국정부에 최종 통고된 3차 초안에서는 울릉도ㆍ제주도ㆍ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키게 되었는지는 향후 추적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독도 문제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에 이미 표면화했다가 1952년초에는 이승만 라인을 둘러싼 한ㆍ일간 대립 격화와 함께 더욱 노골화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들 팸플릿은 일본의 음모가 이미 1946-47년에 시작됐음을 밝혀준다. 정 교수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실제로 독도가 일본의 역사적 영유, 혹은 무주지 선점지였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 일본은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확신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독도 논쟁을 야기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문화일반 |
독도분쟁 종지부 찍을 영국정부 지도 |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표방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한편에서는 꽤 많은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독도가 포함된 영토 분쟁의 씨앗을 잉태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조약 그 자체가 향후 유발할 수 있는 영토 분쟁을 확실히 막을 수 있는가장 용이한 방법은 지도 작성이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조약에 의한일본과 한국 등의 영토를 규정한 지도를 첨부하지 않았다.
대신 이 조약은 전문과 본문 7장(chapter)에 27개 조항(article)으로 구성된 전체 조문 중 제2장 '영토'(territory. 제2-4조)에다 실로 막연하게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대한 영토 규정을 포괄적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한국과 직접 관련되는 제2장 제2조 (a)항에서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파트(제주도)와 해밀튼 항구(거문도)와 다줄렛(울릉도)과 같은 여러 섬?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과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했다.
이 조항만으로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일본영토이며 어디서부터가 한국영토인 지를 알 수가 없다.
지도는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목포대 정병준 교수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발굴한 영국정부의 지도는 획기적이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사실상 좌지우지한 주축국이다. 지도는 영국이 샌프란시스코평화협정을 앞두고 미국과는 별도로 3차에 걸친 검토 끝에 최종 확정해 1951년 4월7일, 미국에 통고한 대일평화협상안에 첨부돼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로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이 지도는 1951년 2월 28일에 제1차로 마련된 영국측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와 제주도까지 일본령으로 포함돼 있다가 수정된 자료라는 점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지도에 대해 오랫동안 독도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백충현(66) 서울대 명예교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백 교수는 "이 지도가 아니라 해도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너무나 많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무엇이기에 저네들(미국과 영국)이 마음대로 독도를 넣었다 뺐다 하느냐"는 불만도 토로했다. 백 교수 지적처럼 독도가 한국령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 지도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 예컨대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 지령(SCAPIN.스캐핀) 677호에 첨부된 지도와1950년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준비하면서 활용한 지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해 1949년 이래 10여 차례 이상 초안을 작성했으나 단 한 번도 영토문제를 다룬 공식지도를 작성한 바 없다. 나아가 1949년 맥아더의 주일정치고문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의 로비를 기점으로 독도는 일본령, 혹은 미언급 상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1951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담 평화협정 초안을 마련하면서공식지도를 제작했다. 이번에 발굴된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명백하게 배제되어 있고, 이는 곧 독도가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지도가 갖는 의미를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이는 샌프란시스코회담 과정에서 제작된 유일한 영국정부의 공식 지도였다. 둘째, 이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 그 이전 평화회담 초안에서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기록했다가, 한국령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정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지도의 행방과 관련해 이상한 대목이 있다. 정 교수에 의하면 일본의 독도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일본 국회도서관의 즈카토모 다카시는 분명히 이 지도를 보았음에도 공개를 하지 않았다. 즉, 즈카토모는 1994년에 발표한 '평화조약과 다케시마(竹島.독도)'라는 논문 말미 구석에다가영국초안의 지도를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존 포스터 덜레스 파일'에서참고했다고 조그맣게 써 놓고 있다. 하지만 즈카토모는 일본의 이익에 불리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이 지도를 지금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영국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1차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제주도와 울릉도까지 일본땅에 포함시켰을까? 그 비밀의 일단은 정 교수가 이번 지도와 함께 공개한 1946-47년에 일본정부가작성해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 정부에 돌린 팸플릿에서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즉, 일본 외무성은 패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벌써 일본이 확보해야 할 도서(島嶼.island)와 소도(小島.islet)ㆍ암초(rocks)에 대한 각종 팸플릿을 '일본본토에 인접한 소도서(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들 팸플릿 중 제4부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까지 자국영토가 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정부는 애초에 이들 팸플릿 등을 통해얻은 정보를 토대로 초안을 작성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그렇던 영국정부가 과연 어떤 통로를 통해 무슨 정보를 얻었기에 2차 초안 이후 미국정부에 최종 통고된 3차 초안에서는 울릉도ㆍ제주도ㆍ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키게 되었는지는 향후 추적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독도 문제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에 이미 표면화했다가 1952년초에는 이승만 라인을 둘러싼 한ㆍ일간 대립 격화와 함께 더욱 노골화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들 팸플릿은 일본의 음모가 이미 1946-47년에 시작됐음을 밝혀준다. 정 교수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실제로 독도가 일본의 역사적 영유, 혹은 무주지 선점지였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 일본은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확신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독도 논쟁을 야기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이런 점에서 이번에 목포대 정병준 교수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발굴한 영국정부의 지도는 획기적이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사실상 좌지우지한 주축국이다. 지도는 영국이 샌프란시스코평화협정을 앞두고 미국과는 별도로 3차에 걸친 검토 끝에 최종 확정해 1951년 4월7일, 미국에 통고한 대일평화협상안에 첨부돼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로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이 지도는 1951년 2월 28일에 제1차로 마련된 영국측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와 제주도까지 일본령으로 포함돼 있다가 수정된 자료라는 점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지도에 대해 오랫동안 독도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백충현(66) 서울대 명예교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백 교수는 "이 지도가 아니라 해도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너무나 많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무엇이기에 저네들(미국과 영국)이 마음대로 독도를 넣었다 뺐다 하느냐"는 불만도 토로했다. 백 교수 지적처럼 독도가 한국령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 지도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 예컨대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 지령(SCAPIN.스캐핀) 677호에 첨부된 지도와1950년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준비하면서 활용한 지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해 1949년 이래 10여 차례 이상 초안을 작성했으나 단 한 번도 영토문제를 다룬 공식지도를 작성한 바 없다. 나아가 1949년 맥아더의 주일정치고문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의 로비를 기점으로 독도는 일본령, 혹은 미언급 상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1951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담 평화협정 초안을 마련하면서공식지도를 제작했다. 이번에 발굴된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명백하게 배제되어 있고, 이는 곧 독도가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지도가 갖는 의미를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이는 샌프란시스코회담 과정에서 제작된 유일한 영국정부의 공식 지도였다. 둘째, 이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한국령임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 그 이전 평화회담 초안에서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기록했다가, 한국령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정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지도의 행방과 관련해 이상한 대목이 있다. 정 교수에 의하면 일본의 독도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일본 국회도서관의 즈카토모 다카시는 분명히 이 지도를 보았음에도 공개를 하지 않았다. 즉, 즈카토모는 1994년에 발표한 '평화조약과 다케시마(竹島.독도)'라는 논문 말미 구석에다가영국초안의 지도를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존 포스터 덜레스 파일'에서참고했다고 조그맣게 써 놓고 있다. 하지만 즈카토모는 일본의 이익에 불리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이 지도를 지금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영국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1차 초안에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제주도와 울릉도까지 일본땅에 포함시켰을까? 그 비밀의 일단은 정 교수가 이번 지도와 함께 공개한 1946-47년에 일본정부가작성해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 정부에 돌린 팸플릿에서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즉, 일본 외무성은 패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벌써 일본이 확보해야 할 도서(島嶼.island)와 소도(小島.islet)ㆍ암초(rocks)에 대한 각종 팸플릿을 '일본본토에 인접한 소도서(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들 팸플릿 중 제4부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까지 자국영토가 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정부는 애초에 이들 팸플릿 등을 통해얻은 정보를 토대로 초안을 작성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그렇던 영국정부가 과연 어떤 통로를 통해 무슨 정보를 얻었기에 2차 초안 이후 미국정부에 최종 통고된 3차 초안에서는 울릉도ㆍ제주도ㆍ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키게 되었는지는 향후 추적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독도 문제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체결한 직후에 이미 표면화했다가 1952년초에는 이승만 라인을 둘러싼 한ㆍ일간 대립 격화와 함께 더욱 노골화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들 팸플릿은 일본의 음모가 이미 1946-47년에 시작됐음을 밝혀준다. 정 교수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실제로 독도가 일본의 역사적 영유, 혹은 무주지 선점지였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 일본은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확신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독도 논쟁을 야기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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