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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대법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꺽정이는 원래 출신이 상놈 백정인지라 어른아이 구분 없이 말을 한 가지만 쓰기를 주장한다. 백두산 저편 오랑캐들은 아비가 자식보고도 해라, 자식이 아비보고도 해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양반이 들으면 기겁할 노릇이지만 오랑캐나 다를 바 없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그 말이 썩 그럴싸하다.
고대(와 현대의) 그리스말에는 존대법이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는 서로 ‘해라체’다. 존대가 습관이 된 우리로서는 죽었다가 살아나도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거듭 ‘해라’로 읽다보면, 번거로운 존대법에서 풀려나면서 완전히 대등한 차원에서 진지한 토론을 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은 존대법을 쓴다고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과 그 행동을 보고 생겨나는 것이다. 존경심을 존대법에 걸어놓은 우리는 말의 내용보다는 우선 말의 생김에 마음을 쓰기 마련이다. 그러니 논쟁을 하다가도 나이 많은,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투가 공손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옆길로 새는 말싸움이 흔히 벌어진다.
도이치 말에 ‘Sie’(당신)와 ‘Du’(너)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우리말의 존대법과는 다르다. 심리적 거리감이 있을 때는 양쪽이 서로 ‘Sie’[지]를, 가까운 사이가 되면 서로 ‘Du’[두]를 쓰니 아비가 자식보고도 ‘Du’, 자식이 아비보고도 ‘Du’ 한다. 영어 역시 이런 맥락에서 오랑캐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니 홍명희가 소설에서 묘사한 임꺽정이는 출신은 상놈이었지만 오늘날 세계에 가져다 놓으면 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세계인의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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