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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8 16:51 수정 : 2005.03.08 16:51



권력자의 탐욕과 지식인의 절망

<당통>, <지붕 위의 기병>, <프라하의 봄> 등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의 대본을 써온 프랑스 작가 장클로드 카리유의 최근작 한 편이 뉴욕의 가장 유명한 오프브로드웨이 극장 중 하나인 ‘조지프 파프의 퍼블릭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바야돌리드의 논쟁>은 1992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용 대본으로 쓰여져 방송되었고 1999년에는 무대용으로 각색되어 파리에서 초연된, 나름대로 상당한 최근작이라 유럽의 최근작에 목마른 소수의 뉴욕 관객들에게는 단비 같은 작품이다.

배경은 16세기 스페인 카스티야의 수도였던 바야돌리드인데, 라틴아메리카 인디언을 인간의 범주에 넣을지의 여부를 놓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몇 년이나 포교활동을 해온 승려 바톨로뮤와 인문학자인 스펠부다가 교황 특사 앞에서 논쟁을 펼친다. 노예 사냥꾼이 잡아온 인디언 가족이 발가벗은 것과 다름없는 복장 그대로 살아있는 증거로 제출된다. 스펠부다가 난쟁이 광대를 동원하여 인디언을 웃기도록 지시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이중의 씁쓸함을 선사한다. 난쟁이를 비하하는 장면은 물론 그 상황 자체가 웬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난쟁이의 농담에 겁 먹던 인디언은 교황 특사가 계단에서 자빠지자 반사적으로 웃고 마는데, 그 순간 이들을 향해 무례하다고 소리지르는 교황 특사 비서의 행동에 이르면 모든 것이 너무나 명료하다. 이 논쟁은 바로 이라크 전쟁 직전 전쟁의 부당함과 정당함을 두고 수십차례 벌여왔던 논쟁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인디언을 옹호하는 승려 바톨로뮤의 길고 지루한 주장을 들으면서 더욱 당혹스러워진다. 그는 인디언을 대등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개종시키고 포용해야 하는 미개한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자신이 박애주의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인디언을 동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인디언 가족을 눈 앞에서 처음 보면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스펠부다의 모습이야말로 매우 흥미진진하다. 인디언에 관련된 턱없이 과장된 기행문 등만을 토대로 이들을 웃음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눈 앞의 인디언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질흙 같은 흑인 노예를 보며 그는 심한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영특하고 온화한 인물인 교황 특사는 마침내 인디언이 인간임을 선언하지만 국왕과 귀족, 특히 교황의 전언을 들고 온 노예상의 협박으로 판단을 유보한다. 스펠부다는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기보다 의심을 품으며, 바톨로뮤는 자신의 논쟁이 결국 정복자들의 물욕에 들러리가 되었을 뿐임을 깨닫고 절망한다.

이 작품이 쓰여진 것은 9·11 테러도 있기 훨씬 전이지만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서구문명의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란 것이 탐욕 앞에서 얼마나 형편없이 쭈그러들곤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스펠부다가 아메리카 인디언과 인디언이 믿는 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장면의 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주장을 연상케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를 감싸 안는 바톨로뮤의 절망적인 모습은 부시 대통령을 말리지 못했던 미국 지식인들의 무력함과 맞닿아 있다.

이수진·조용신 공연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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