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휘트니 비엔날레 당시 주목받았던 작가 바이런 킴의 대표작 <제유법>. 키키스미스, 척 클로스 등 저명작가들과 작가의 친구, 가족들, 낯선 이방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피부빛깔을 표현한 격자 수백개로 구성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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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말한다
인종, 추억, 사람을
한국계 미국작가인 바이런 김(44)은 숨 쉬고 피가 도는 듯한 추상그림을 그린다. 살구빛, 갈색빛, 흙빛, 검은 빛을 띤 작은 네모칸들이 수백개나 배열된 그의 대형그림 <제유법>을 본다. 멀리서 보면 살풍경한 미니멀한 그림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모유처럼 끈적끈적한 색감부터 느끼게 된다. 왜 느낌이 그럴까. 전시설명을 보니 의문은 단박에 풀린다. 그건 자기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살갗 색깔이었다! <열두달 된 에멧트>라는 소품은 자기 아들의 뺨, 허벅지, 입술 등 신체 25개 부위의 다른 색깔을 담았고, 어머니 피부색을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전시장의 다른 구석을 보니 옛적 좋아했던 자동차 색깔, 고려 청자 유약의 미묘한 색깔도 그렇게 그려 걸어놓았다. 자기 주변의 세상의 색깔에 대해 유난히 집착하고 천착해온 그가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첫 한국 개인전을 열고 있다. 93년 휘트니비엔날레에서 살갗색깔 그림으로 주목받은 이래 추상회화와 일상, 현실의 이슈를 색다르게 접목한 작업을 해온 바이런은 광주비엔날레와 아트선재센터 기획전 등에 단편적으로 소개됐을 뿐 국내 화단에는 생소한 인물. 전시는 초기작업부터 출세작인 <제유법> 등의 대표작, <고려청자>유약시리즈, 하늘 그림 등의 근작까지가 망라된 회고전 형식이다. 색깔로 세상사 은유
단색조 추상그림으로
순수조형 넘어선
다른 ‘모더니즘’ 추구 바이런의 작품들은 얼핏 미니멀, 단색조 회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미술을 틀거지로 삼으면서도 색조나 화면구성 등에서 미묘한 도발을 집요하게 시도한다. 얼핏 로스코나 애그니스 마틴 같은 색채추상, 미니멀 작업들을 좇는 듯하면서도 순수한 조형요소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문제 등의 정치적 이슈나 자신의 추억 등을 색 그자체로 은유하는 것이 그렇다. 대표작인 <제유법>이 이런 작가적 특징을 대표하는 데, 유명작가, 가족, 모르는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정미랗게 관찰해 집합적인 패널그림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색깔로 표현한 미국 사회 인간군상들의 초상화인 셈이다. 화면에 바른 안료를 지문을 찍어 흐트러뜨리거나 캔버스에 주머니를 단 뒤 불룩하게 푸른 안료를 부어넣은 <배그림> 등 초기작업도 이런 의도를 뚜렷히 보여준다. <고려청자>유약시리즈는 유약의 푸른 빛이 내는 차이를 섬세하게 그린 색채추상인데 청자잔의 깨진 단면에서 그런 차이의 색감을 발견했다는 작가의 고백이 새삼스럽다. 근작들은 하늘빛을 그린 것들이 많다. 2001년 1월 이후 매일 일기처럼 단문을 아래에 쓰고 일기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을 묘사한 <하늘그림>연작, <흰색그림>시리즈 등에서는 색덩어리들이 엉키거나 서로 스며드는 섬세한 변화를 몽환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재현을 무시하고, 그림 자체의 본질을 추구해온 모더니즘에 들창을 내는 듯한 이런 작업들은 19세기 풍경화를 색채와 형태의 조합으로 바꿔버린 화가 휘슬러의 작업과 비슷하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란 점에서 흥미롭다. 90년대 의미에만 기댄 채 가벼워진 현대미술의 새로운 암중모색을 읽을 수 있는 전시다. 26일 오후 2시 큐레이터와의 대화가 있으며 ‘기억속의 색깔만들기’란 관객 참여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5월8일까지. (02)2259-778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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