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④ 대동아공영권 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 발간을 앞두고,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과 함께 그 내용과 쟁점을 매주 수요일마다 소개한다. 3국 교과서에는
한·중, ‘대동아’ 용어 부정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위한 인적·물적자원 수탈과 저항 실어
일 “남방진출 아시아 독립 앞당겼다” 미화 ‘대동아’ ‘대동아전쟁’ ‘대동아공영권’ 등의 개념은 일본 역사교과서에만 등장한다. 한국과 중국 교과서에는 대동아라는 낱말 자체가 없다. 태평양 전쟁 또는 2차 세계대전 등의 용어를 쓰면서, 이 시기 일제의 수탈과 침략, 그리고 이에 맞선 저항을 서술하고 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 제국이 창출한 정치적 구호인 ‘대동아’를 적극적으로 불러와 그 실체와 논리를 보여준다. 다만 그 시각은 비판적이다. 3장 2절 ‘일본의 침략전쟁’ 편에서 여러 쪽을 할애해 ‘대동아공영권의 환영(幻影)’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중국 학생들의 시선을 넓히는 동시에, 일본 학생들의 마비된 비판의식을 일깨우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동아공영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살아나는 대동아공영론의 실체는 현행 일본 교과서에 있다. “일본 정부는 전쟁목적이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후소사판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노골적으로 ‘대동아전쟁’이란 용어를 쓰면서 그 이상에 은근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말레이 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영국을 격퇴하면서 쾌속진격해 … 영국의 동남아시아 지배를 무너뜨렸다”고 적었다. 특공대원의 유서를 실으면서 “일본군은 항복하지 않고 차례차례로 옥쇄”했다고 강조한다. “일본군의 남방진출은 아시아의 독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는 서술도 계속된다. 대동아전쟁은 후소사 교과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 대목이다. 공동 교과서 집필위원인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는 “일본 우익들이 대동아공영론을 복권하려는 것은 과거 침략전쟁을 식민지해방·자존자위·인종차별철폐 전쟁으로 미화하는 것이자, ‘정치군사대국’ 일본을 만드는 선전전이자 전초전”이라고 비판한다. 도쿄서적판 <역사>는 중립적 개념인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식민지를 얻고 자원을 획득하려고 일본이 동남아에 진출했다”거나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시아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서술했지만, 대동아공영론의 허상을 본격적으로 짚지는 않았다.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단계를 밟아 대동아공영론의 실체에 접근한다. 우선 1940년 7월 고노에 내각이 발표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의 구상을 소개했다. 1943년 11월 도조 수상이 소집한 대동아회의의 내용도 담담하게 적었다. 이 두 단계를 거치며 학생들은 대동아공영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되짚어 본 뒤, 마지막으로 대동아공영권의 실태를 살피게 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구미 열강을 대신하는 일본의 지배를 치장한 논리인 대동아공영권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고개 드는 ‘대동아공영’ 망령 일 우익 ‘제국’ 복권 꿈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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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독립 열망 이용 ‘서구축출’ 교묘한 접근 동남아시아에는 한국인들이 언뜻 이해하기 힘든 대동아공영의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다. 대만이 대표적인 경우다. 역사적으로 대만에서는 대륙 출신과 토착 세력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차지한 일본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세이던 토착 세력을 우대해 원활한 지배를 꾀했다. 대륙 출신 중심의 국민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토착 세력은 일본을 ‘변함없이 좋은 이웃’으로 여겼다. 일본 우파도 대만 민주화 이후 집권한 리덩후이와 천수이벤 정권에 노골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는 대만 토착세력을 거든 것이다. 대만을 둘러싼 복잡한 역학구조는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변주’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다. 이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전선으로 흔히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동남아시아의 상황은 이런 대립구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의 민족독립운동 세력이 맞서 싸운 상대는 미국·영국 등 식민지 종주국이었다. 동시에 이들 국가는 독일·일본과 맞선 ‘반파시즘 진영’에 속했다. 동남아에서 민족독립과 반파시즘 투쟁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이 불가능했던 이유다. 일본제국주의는 바로 이 점을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대동아공영권의 흡인력은 서구 세력의 축출과 식민지 해방이라는 이념을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독립 전략’으로 선전한 데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미사여구의 본질이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배라는 것을 간파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식민지 독립은 이미 시대적 대세로 굳어지고 있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면전쟁을 펼칠 때, 대부분의 인도 지방자치정부는 이미 인도인의 손에 이양된 상태였다. 필리핀과 미안마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에 가장 협조적이었다는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들여다 보자. 일본 우익들은 “미·영의 세력이 격멸되지 않는 한 아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안전은 불가능하다”고 연설했던 인도네시아 건국의 영웅 수카르노를 대동아공영권을 두둔하는 증거로 내민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일본군은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에 질 것이고 우리는 그들도 쳐부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공공연히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카르노가 자서전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다. 하종문
미얀마 독립약속 일본 군정…천황숭배 강요 아웅산 항일봉기 몰아내 미안마 독립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아웅산(노벨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은 대동아공영권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영국 지배 하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펼치던 아웅산 그룹은 미안마 독립의 약속 아래 일본군과 접촉해 버마국군을 조직했다. 1942년 5월 아웅산이 지휘하는 미안마국군은 일본군과 나란히 양곤(랭군)에 입성했다. 주민들은 독립의 상징인 미안마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미안마를 점령한 일본군은 군정을 펴고 독립을 지연시켰다. 이후 출범한 미안마 중앙정부도 일본군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다. 전황이 불리해지던 1943년 8월, 일본은 미안마의 독립을 뒤늦게 인정했지만, 군사·외교·경제 등은 여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다. 불교도가 대부분인 미안마인들에게 가해진 천황 숭배 강요를 비롯한 일본군의 일상적인 폭행과 약탈, 군표 남발과 강제동원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4년 8월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한 아웅산은 이듬해 3월 인민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미안마 정권에 대항해 봉기했고, 같은 해 5월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양곤을 해방했다. 서구의 지배로부터 동남아시아가 해방된 것은 결코 일본이 ‘원하지 않았던’ 역사적 필연일 따름이다. 하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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