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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6 17:07 수정 : 2005.03.16 17:07

누군가가 길거리에 침을 뱉기만 해도, 아니 자기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뜨린다 해도 정부에서 그가 누군지를 식별해내고 때로 제재를 가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는 끔찍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상황이어서 얼핏 생각하기에 에스에프 소설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상상도 아니고, 공연히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려는 선정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로 갈 수도 있는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몸의 정보가 통제·차별 근거로

19세기 사회의 대표적 부산물인 지능지수(아이큐) 검사가 21세기에는 유전자 검사로 대체되었고, ‘바이오벤처’들은 유전자를 샘플링해 용기에 넣어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이 용기에 포장되어 ‘QYT072009’와 같은 식의 기호를 부여받는다. 미국은 전과자 12만 명의 유전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한 코디스(CODIS·Combind DNA Index System)를 세웠고, 마침내 아이슬란드는 전국민의 유전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이제 생명, 신체는 기술에 의해 조작되고, 자본주의에 의해 판매·유통되고,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런 상황을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바 있다.

권력의 주체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려면 지배의 대상들이 분명하게 확인되어야(identify) 한다. ‘아이덴티파이’한다는 것은 곧 어떤 사람의 아이덴티티(동일성)를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론적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서 그 대상이 자기가 알고 있던, 또는 자기가 찾고 있던 ‘그’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어떤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아침 자신들의 담임선생님을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대상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보는 것을 영어로는 ‘레커그나이즈’(re-cognize)로 표기한다. 곧 그 대상을 ‘다시’ 확인(確認)하는 것이다.

이런 확인이 가능하려면 확인하려는 그 대상이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만일 담임 선생님이 하룻밤 새에 변해버렸다면, 학생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렇게 동일성이 존재함으로써이다.(그런데 자세히 보면 담임선생님은 사실 변했다. 머리카락도 길어지고, 몸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그를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시간 속에서 변해 가면서도 그 변화를 소화해 가는 동일성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동일성의 존재를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 인식의 토대이며,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동일성의 논리를 다듬어 왔다. 그러나 동일성의 문제는 순수 인식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치의 맥락에서도 동일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동일성이 정치적 맥락을 띠게 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배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지배의 주체들은 그들의 ‘신민(臣民)들’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대상의 동일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장 원초적인 방식은 타인의 신체를 빌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시켜 그를 어딘가에 가게 해서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게 한다면, 그렇게 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를 시켜 자기가 보지 못한 어떤 대상을 보고하게 만드는 것은 대상 확인이 정치적 지배를 통해서 수행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게놈 결정론’ 인간관계망 부정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상 확인의 방식은 조금씩 ‘진화’하게 된다. 대상을 확인해서 그것을 지배의 눈길 아래에 두는 방식의 진화인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한 요소가 사회의 의학화이다. 지배 주체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의학적 지식들, 좀더 넓게는 생명과학과 연계되는 각종 지식들을 동원하는 방식을 푸코는 ‘생체정치’라 부른다.

생체정치의 중요한 한 요소는 인구 문제이다. 인구는 성행위를 통한 생명체의 증식이라는 자연적 흐름과 정치적 장치들을 통한 주민들의 통제라는 사회적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인구를 조절하는 것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고대의 전쟁은 역설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포로를 회득하려는 전쟁이었다.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자 ‘산아 제한’이라는 개념이 등장해 인구의 증가를 조절하게 된다. 출산율이 급감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노동력 확보를 위한 ‘출산 장려’가 등장했다. 인구 문제는 사회를 관리하는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생물학적 정체성은
조작되고 유통되는 상품이다
성형수술을 하듯 유전자를 고치고
기업·정부는 부·권력을 강화할 것이다
인식주체에 의한 주체 자신의 객체화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강화된 경우가 있었던가

위생 문제 또한 중요하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을 통제하기 위해 동원했던 주요 개념들 중 하나가 ‘위생’이었다. 위생을 근거로 사람들의 신체를 지표화하고 분류하고 평가함으로써 신체 관리 체계를 운영할 수 있었다. ‘더럽다’라는 말에는 매우 복잡미묘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이 ‘더럽다’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 생체정치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측면이다.

이 밖에도 무수한 형태의 생체권력들이 존재하거니와, 이 장치들이 직접적으로 차별에 동원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가장 즉물적인 것으로는 피부색에 의한 차별 및 성적인 차별이다. 신체적으로 즉각적으로 변별되는 이런 형질상의 차이들은 정치적 차별의 근거로 작동한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을 식별해내고 구분 짓고 분류/평가해서 차별하는 무수한 권력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루타’의 경우는 그 가장 극단적인 경우라 하겠다.

사회의 의학화는 지배 주체들이 사람들의 신체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의 신체들을 각종 지표들로 표시하고 그 정보들을 확보함으로써 사람들을 확인하며, 그런 확인이 가능하지 않다면 지배도 가능하지 않다.

전통 사회에서의 생체권력들과 오늘날의 생체권력들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생체권력은 분자생물학이라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라는 두 핵심 요소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은 한 사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서 작동하고 있다. 한 사람의 염기배열, 특히 ‘게놈’이라 불리는 그 종합적 지도는 한 개체로서의 한 개인을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장치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 한 인간은 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이라는 네 개의 염기들이 배열된 하나의 방식으로 환원된다.

과학·자본 결합 생체권력 등장

이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대단히 유치한 사고방식으로서, 한 존재의 동일성을 그 존재를 구성하는 어떤 한 요소로 환원해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한 인간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란 결정되어 있는 무엇이 전혀 아니며 우발적으로 생성해 가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만나 어떻게 변해 갈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절대 우발성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의’ 대상 안에 어떤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발견하면 그 존재가 모두 해명된다는 식의 생각은 19세기에 이미 극복된 낡은 존재론의 유산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식 방법은 오늘날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지식이 자본과 결합함으로써 지배의 새로운 양태들이 전개된다는 점이다. 푸코는 지식-권력의 문제를 논했거니와, 오늘날 이에 못지않게 지식-자본의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면 텔레비전 뉴스는 그 학문적 내용이나 문화사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부가가치’를 역설한다. 자본주의는 분자생물학이 가져온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노리면서 새로운 형태의 생체권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한 인간의 생물학적 정체성은 실험되고 조작되고 판매되고 유통되는 상품이 되었다. 장기의 판매 같은 것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한 인간의 유전정보가 무책임하게 유출되었을 때 일어날 일들, 정부나 기업에서 한 인간의 유전정보를 쥐고서 통제할 때 일어날 일들, 부모들이 더 잘 생기고 똑똑한 자식을 가지겠다고 날뛸 때 일어날 일들, 한 가족 성원의 유전정보 유출이 다른 성원들에게 끼칠 영향, 길거리에 침만 뱉어도 누군지 확인되는 완벽한 통제사회의 도래, 이 모든 상황들이 하나의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 특정 주체들에 의해 다른 주체들이 철저하게 객체화되는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형 수술을 하듯이 자신의 유전자를 고치려 할 것이고, 과학자들은 미래의 비극을 외면한 채 오로지 경쟁 상대자들만 바라보면서 밤을 샐 것이고, 기업과 정부는 유전정보를 활용해 부와 권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인식주체에 의한 주체 자신의 객체화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강화된 경우가 일찍이 있었던가.

인간은 세계를 알기 위해 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지식은 인류에게 더 무겁고 두려운 현실을 짐 지우곤 한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가 다시 더 큰 운명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인류의 역사는 역운(逆運)의 역사인 것이다.

이 역운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나마 늦추려면 대중 전체가 각성해서 권력과 자본의 지배 장치들에 저항하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대중 전체가 깨어나려면 우선 그들을 깨울 수 있는 전위부대로서의 지식인(매우 넓은 의미)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인들만이 득실대는 이 시대에 저항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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