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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2 17:22 수정 : 2005.03.22 17:22

폴 테일러의 가장 최근작 중 하나인 ‘단테 변주’. 베테랑 무용수인 마이클 트르스노벡과 라이사 비올라. 사진 로이스 그린필드

누구도 즐거움의 몸짓에 맞설 수 없다

무용계의 살아있는 신화 ‘폴 테일러 댄스 컴퍼니’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했다. 1952년, 어메리칸 댄스 페스티발의 심사위원이었던 마사 그래함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스물 한 살의 폴 테일러는 그로부터 고작 2년 뒤인 1954년, 그 자신의 무용단을 만들어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공연을 시작했다. 뉴욕 시티 센터는 3월 1일부터 3월 20일까지 3주에 걸쳐 폴 테일러의 전 작품 121개 가운데 선정한 열 아홉 작품을 공연하는 일정을 끝마쳤다. 50주년 기념 공연은 미국 전역을 돌고, 2006년에는 세계 투어에 들어가지만 뉴욕 외의 어느 도시에서도 열 아홉개의 레퍼토리가 3주에 걸쳐 올라가는 일은 없다.

이번에 공연된 레퍼토리에는 1957년에 공연된 <7개의 새로운 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당시 폴 테일러는 ‘춤’이라는 움직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여 무대 위에서 4분 동안이나 꼼짝 않는 ‘안무 아닌 안무’를 선보였고 <뉴욕 해롤드 트리뷴>의 무용 비평가 월터 테리는 ‘추지 않은 춤’에 대해 4인치 정사각형의 무용 비평란을 완전히 비움으로서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도 폴 테일러의 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멈추었던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의 춤을 보고 난 후에는 누구라도 그의 춤이 발산하는 ‘즐거움’ 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춤은 심지어 근친상간의 비극을 담고 있는 호러인 <빅 베르타(Big Bertha) 1974년>에서조차 빛이 난다. 그것은 가벼운 유머감각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즐거움이자 재미다. 그래서 때로 그 즐거움이 불가사의하게 느껴기도 한다.

미국 모던댄스의 시조와도 같은 마사 그래함의 춤이 ‘모던’이라는 그 말 자체에 얽매여 신화에 속박당했고, 머스 커닝햄이 몸을 지극히 괴롭히면서, 몸 외부로의 탈출과도 같은 몸짓을 시도하는 지난한 과정에 있었다면, 폴 테일러의 춤은 이런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졌음을 선포하는 듯한 춤을 보여준다. 그의 춤은 그야말로 움직이고 있는 즐거움, 춤 추는 즐거움, 음악이 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춤이 음악을 어떻게 끌어들였는가, 작은 소음 하나가 어떻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뽀빠이는 세일러맨’, ‘이치 비치 티니 위니’ 등의 재밌는 가사를 담은 기존의 노래를 사용한 너무나 유머러스한 춤 <즐거운 보고서 1994년> 등을 통해 관객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용한 <산책길 1975년> 에서는 무대의 사면에서 대각선을 그으며 춤추는 댄서들의 몸짓과 바흐의 아름다운 음악을 보고 있자면 춤을 보며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꼭 해석하려 드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깨닫게 된다. 춤은 애당초 예술 장르 중에 가장 우선해서 존재했다. 그것은 음악보다도, 드라마보다 훨씬 앞서서 있었다. 그저 몸 하나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폴 테일러는 바로 그 존재의 즐거움을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수진·조용신 공연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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