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렵한 지붕돌 처마의 끝맺음이 돋보이는 정림사터 5층석탑의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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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치욕 떠안은 슬픈 운명
‘석탑의 정수’ 최근 자태 인정 ‘벌레먹은 잎처럼 흐릿한 글자획/새 쪼은 나무마냥 어지러운데/ 이따금 이어진 네댓 글자는/ 문장 조리 훌륭하구나/ 대장 도량 넓음을 거론하였고/ 빨리 이룬 무공을 과시하였네 … 개선노래가 강 고을을 진동할 적에/ 만백성은 엎드려 있고/ 많은 돛배 바다로 돌아갈 적에/ 그들 사기 온 누리 충만했으리/ 승리는 한때의 기쁨이며/ 패배 역시 한때의 치욕일 따름일 터/ 지금 탑은 들밭 가운데 놓여 / 나무꾼 소몰이꾼들의 놀이터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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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석탑의 정수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이 탑은 기단이 1층 지붕돌보다 폭이 좁고 지붕돌 또한 처마 끝이 치켜올라가 날씬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학계에서는 가장 조형성이 돋보이는 탑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탑이 본래의 가치와 위엄을 되찾은 지는 3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백제 멸망 뒤 사실상 버려진 탓에 일제 때까지 변변한 이름 하나 없다가 1942년 후지사와라는 일본 학자가 절터를 발굴하면서 찾은 기와에 정림사란 고려시대 사찰명이 발견되어 지금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제탑이란 별칭을 부르는 이들이 많았다. 정림사탑이 풍기는 비장미를 또다른 감회로 음미했던 이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다. 그는 66년 낸 수필집 〈가람문선〉에 실린 ‘사비성을 찾는 길’이란 단문에서 40년대 ‘광막한 들길 가로질러’ 부여성 정림사터의 ‘평제탑’을 찾았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 당인의 필적이야 있든 없든 또한 평제든 아니든 탑은 탑대로 이름을 전한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경구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바로 이 석탑인 것이다. 부여 출신으로 생전 이곳에서 부인과 데이트를 즐겼던 요절시인 신동엽은 장시 〈금강〉에 이렇게 써놓았다.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어스름녘 석양을 받은 백제탑의 몸돌은 체온처럼 따뜻하다. 탑신 곳곳에 그을음과 천년의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처음 지을 때 발원대로 자비행의 온기를 주는 탑은 지금도 우리 삶과 함께하고 있다. 부여/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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