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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7 16:57 수정 : 2005.03.27 16:57

날렵한 지붕돌 처마의 끝맺음이 돋보이는 정림사터 5층석탑의 세부.

⑪ 정림사 오층석탑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어질 기억마저 모조리 차지하지는 못한다. 진 자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힘으로 살아남는다. 역사와 기억의 저장고인 문화유산 앞에서 이런 진리는 더욱 오롯해진다.

우리 전통석탑의 뿌리이자 백제 졈뮌?포한이 스며든 문화유산인 충남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을 답사하는 여정 또한 그런 진리를 실감하는 길이다. 3월 중순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만난 정림사 탑은 푸른 하늘 아래 날렵한 지붕돌 끝의 쳐들린 선으로 미소지었다. 그러나 1층 탑신부에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명으로 새긴 ‘대당평백제국 비명’은 이내 처연한 상념을 부른다.

당시 숱한 양민들을 살상하고 사비성 안의 궁성과 사찰을 불지른 소정방은 전과에 고무되어 공훈비를 새기기로 한다. 그러나 악행이 두려웠던 탓인지, 차마 비석에 새기지는 못하고, 어이없게도 왕도의 한복판 사찰(그때 절 이름은 지금도 모른다)에 있는 불탑에 새기게 된다. 문사 권회소를 시켜 새긴 명문은 우아한 저수량체로 탑사면에 둘러 쓴 장문이다. 내용을 보면 출정한 중국 장수들의 공덕을 치켜올리고 잡아간 왕족, 백성과 정복한 땅의 내력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끝간 줄 모르는 이국 장수의 기고만장함이 느껴진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 떨어져 천상을 어지럽게 하고 정사를 그릇되게 하여 백성이 원망하니 우리 황제가 형국공 소정방으로 하여금 원정케 하였으니 … 형국공이 일거에 삼한을 평정하였다. 부여 의자왕과 태자 융과 도독, 37주 250현을 두었고 호수는 24만, 인구 620만…”

절제와 의기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이런 참경을 묵과할 리 없었다. 탑의 미술사적 가치는 잘 몰랐지만, 탑신에 새겨진 대당평제비문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인근 청양의 지방관인 금정 찰방으로 부임했던 시절 정림사탑을 답사하고 평제비문 글씨를 뚫어지게 관찰했던 듯하다. 훗날 자신의 시문집에서 “평제탑 기록이 공적을 대단히 과장해서 찬양했다”며 “중국의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자(好事者)들에게 준다면 반드시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애완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그가 남긴 ‘소정방의 평백제탑을 읽고[讀蘇定方平百濟塔]’란 제목의 한시 또한 백미라고 일컬을 만하다.

당나라 장수 전훈 새겨 능욕
패배 치욕 떠안은 슬픈 운명
‘석탑의 정수’ 최근 자태 인정

‘벌레먹은 잎처럼 흐릿한 글자획/새 쪼은 나무마냥 어지러운데/ 이따금 이어진 네댓 글자는/ 문장 조리 훌륭하구나/ 대장 도량 넓음을 거론하였고/ 빨리 이룬 무공을 과시하였네 … 개선노래가 강 고을을 진동할 적에/ 만백성은 엎드려 있고/ 많은 돛배 바다로 돌아갈 적에/ 그들 사기 온 누리 충만했으리/ 승리는 한때의 기쁨이며/ 패배 역시 한때의 치욕일 따름일 터/ 지금 탑은 들밭 가운데 놓여 / 나무꾼 소몰이꾼들의 놀이터가 되었구나….’

▲ 1층 몸돌 사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한국 석탑의 정수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이 탑은 기단이 1층 지붕돌보다 폭이 좁고 지붕돌 또한 처마 끝이 치켜올라가 날씬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학계에서는 가장 조형성이 돋보이는 탑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탑이 본래의 가치와 위엄을 되찾은 지는 3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백제 멸망 뒤 사실상 버려진 탓에 일제 때까지 변변한 이름 하나 없다가 1942년 후지사와라는 일본 학자가 절터를 발굴하면서 찾은 기와에 정림사란 고려시대 사찰명이 발견되어 지금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제탑이란 별칭을 부르는 이들이 많았다.

정림사탑이 풍기는 비장미를 또다른 감회로 음미했던 이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다. 그는 66년 낸 수필집 〈가람문선〉에 실린 ‘사비성을 찾는 길’이란 단문에서 40년대 ‘광막한 들길 가로질러’ 부여성 정림사터의 ‘평제탑’을 찾았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 당인의 필적이야 있든 없든 또한 평제든 아니든 탑은 탑대로 이름을 전한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경구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바로 이 석탑인 것이다. 부여 출신으로 생전 이곳에서 부인과 데이트를 즐겼던 요절시인 신동엽은 장시 〈금강〉에 이렇게 써놓았다.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어스름녘 석양을 받은 백제탑의 몸돌은 체온처럼 따뜻하다. 탑신 곳곳에 그을음과 천년의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처음 지을 때 발원대로 자비행의 온기를 주는 탑은 지금도 우리 삶과 함께하고 있다.

부여/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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