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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9 19:37 수정 : 2005.03.29 19:37

중일전쟁 당시 중국인 포로들을 상대로 총검훈련을 하는 일본군들. 난징대학살은 독일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살육이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이에 대한 ‘기억’을 피해간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⑥ 난징대학살

중, 끔찍한 사례 적나라 기록 고통 새겨
일, ‘학살’ 대신 ‘사건’ 으로 써 가해 약화
한, 언급 빠져 동아시아 피해 공유 못해

“올해 76살의 한 할머니는 당시 12살의 나이로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3명의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기억을 이야기해줬다. 또다른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의 총검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남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연홍 중국 난징사범대 역사학부 교수가 지난 2002년 한·중·일 공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의 한 대목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난징대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아시아판 홀로코스트”라고 말한다.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도 “일본군에게 집단학살 당하고 시체가 훼손된 경우가 19만여명, 소규모 학살로 매장된 시체는 15만여구”라며 학살의 실체를 드러낸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홀로코스트’는 그러나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중학교 <사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덕분에 한국인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은 알아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일 관계의 가장 큰 ‘균열과 마찰’은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억에서 발생한다. 한국인에게 이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난징대학살이 동아시아 공동역사인식의 핵심고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중국은 초급중학교용 <중국역사>와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를 통해 난징대학살을 상세히 적고 있다. 읽는 것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여러 학살 사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에 비해 일본 교과서의 시각은 혼란에 빠져있다. 채택률이 가장 높은 도쿄서적판 중학생용 <일본사>는 “…그 과정에서 중국인을 대량으로 살해했다(난징사건). 이 사건은 난징대학살로 국제적으로 비난받았지만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대학살’이라는 정의는 다른 나라의 시각이고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일본의 관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후소사판 교과서도 ‘난징사건’이라 부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도쿄전범재판의 난징학살 판결을 설명하면서 “이 사건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의 의문도 제시되어 있고 여러 견해들이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며 발을 빼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인 교수는 “일본 역사학계에서조차 난징대학살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은 이미 끝났다”며 “군국주의 부활의 수단으로 역사의 조작과 왜곡을 선택한 일본 우익들이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두번째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난징대학살의 실체를 정면으로 다뤘다. 학살의 규모와 배경, 실제 사례 등도 소개했다. 그러나 중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표현은 없다. 대신 난징대학살에 뒤이어 한국·일본민중의 피해를 함께 적고 있다.

여기서 난징대학살, 군위안부 및 인력동원 피해자, 연합군의 공습과 원폭투하 사망자 등은 한데 어울려 역사의 한 시대를 이룬다.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피해’의 기억을 한·중·일이 공유하려는 노력이다. 서로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이해·성찰해 ‘국가간의 증오’를 넘어서자는 제안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피맺힌 증언에도 “증거없다” 일 우익 툭하면 ‘날조’ 만행

● 55년 1차 교과서 파동
원폭 피해·난징 가해 쏙 빼

● 70년대 2차 파동
난징 넣었다가 수정 시도

● 90녀대 중반 3차 파동
우익 “난징은 거짓말” 유포

▲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1946년 도쿄전범재판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가 26만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발견된 영국 외교문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난징의) 난민구역 및 주변지역에서 일본 병사는 공공연히 술을 마시고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빼앗는 등 폭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늘 석연치 않았다. 1955년 ‘제1차 교과서파동’이 일어났다. 일본 우익은 아시아 침략을 서술하고 이를 반성·비판한 초중고 교과서가 편향적이라고 공격했다. 문부성은 가해와 피해 사실 모두를 교과서에서 삭제했다. 원폭투하로 인한 고통의 기억과 함께 난징대학살의 역사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1970년대 중반 난징대학살이 다시 역사교과서에 등장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익의 압력에 굴복해 다시 한번 가해사실의 삭제·수정을 시도했다. 한국·중국 등의 격렬한 비판과 항의가 1982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다. 결국 일본 정부가 굴복했다. 1984년판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1985년판 고교 일본사 교과서 모두에 난징대학살이 서술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제3차 교과서 파동’의 핵심쟁점은 난징대학살 ‘완전부정론’이다. 2000년 1월23일 일본 우익단체들은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난징대학살 철저 검증 집회’를 개최했다. 난징대학살은 가공의 사실이며 일본은 전쟁범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반일적이고 자학적이고 암흑적인 가해사실’의 삭제를 요구한 이들은 지방조직까지 결성하며 시민운동 차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언론도 가세했다. 1999년 <산케이신문>은 ‘난징의 진실’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학살도 강간도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출판계 역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책이나 잡지를 경쟁하듯이 간행했다.

애초 난징대학살은 중국인에게도 잊혀진 과거였다. 냉전 시기 중국과 대만이 경쟁적으로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시도하면서 시빗거리가 될지 모르는 난징대학살이 묻혀졌다. 생존자들의 고통스런 기억 속에서만 연명하던 난징대학살은 일본의 제2차 교과서 파동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생존자들이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들은 남편을 잃은 아내, 부모를 잃은 고아, 아들과 딸을 잃은 부모, 일본군에게 모욕당한 부녀자들이었다. 1985년에는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공유하기 위한 기념관이 난징에 설립됐다. 이제 매년 난징 함락일인 12월13일 오전 10시가 되면 난징에서는 대학살의 희생자와 생존자를 추모·위로하기 위한 경적이 울린다. 일본에 대한 중국인의 적대감의 뿌리에는 난징대학살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난징대학살은 두 나라 역사투쟁의 최전선이다. 난징대학살의 프리즘을 통해 보면 중·일간의 공동의 기억공간은 실종되고 없다. 해법은 간단하다. 가해자가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난망하다. 엉킨 실타래를 누군가 풀어야 한다. 공동교과서에는 중국학자들이 신중하게 서술하고, 일본학자들이 흔쾌히 용인한 난징대학살의 진실이 담겨 있다. 양심과 정의를 신뢰하며 공동의 기억공간을 마련하려는 희망이 여기에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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