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당시 중국인 포로들을 상대로 총검훈련을 하는 일본군들. 난징대학살은 독일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살육이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이에 대한 ‘기억’을 피해간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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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⑥ 난징대학살 중, 끔찍한 사례 적나라 기록 고통 새겨
일, ‘학살’ 대신 ‘사건’ 으로 써 가해 약화
한, 언급 빠져 동아시아 피해 공유 못해 “올해 76살의 한 할머니는 당시 12살의 나이로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3명의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기억을 이야기해줬다. 또다른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의 총검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남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연홍 중국 난징사범대 역사학부 교수가 지난 2002년 한·중·일 공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의 한 대목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난징대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아시아판 홀로코스트”라고 말한다.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도 “일본군에게 집단학살 당하고 시체가 훼손된 경우가 19만여명, 소규모 학살로 매장된 시체는 15만여구”라며 학살의 실체를 드러낸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홀로코스트’는 그러나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중학교 <사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덕분에 한국인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은 알아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일 관계의 가장 큰 ‘균열과 마찰’은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억에서 발생한다. 한국인에게 이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난징대학살이 동아시아 공동역사인식의 핵심고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중국은 초급중학교용 <중국역사>와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를 통해 난징대학살을 상세히 적고 있다. 읽는 것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여러 학살 사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에 비해 일본 교과서의 시각은 혼란에 빠져있다. 채택률이 가장 높은 도쿄서적판 중학생용 <일본사>는 “…그 과정에서 중국인을 대량으로 살해했다(난징사건). 이 사건은 난징대학살로 국제적으로 비난받았지만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대학살’이라는 정의는 다른 나라의 시각이고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일본의 관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후소사판 교과서도 ‘난징사건’이라 부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도쿄전범재판의 난징학살 판결을 설명하면서 “이 사건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의 의문도 제시되어 있고 여러 견해들이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며 발을 빼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인 교수는 “일본 역사학계에서조차 난징대학살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은 이미 끝났다”며 “군국주의 부활의 수단으로 역사의 조작과 왜곡을 선택한 일본 우익들이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두번째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난징대학살의 실체를 정면으로 다뤘다. 학살의 규모와 배경, 실제 사례 등도 소개했다. 그러나 중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표현은 없다. 대신 난징대학살에 뒤이어 한국·일본민중의 피해를 함께 적고 있다. 여기서 난징대학살, 군위안부 및 인력동원 피해자, 연합군의 공습과 원폭투하 사망자 등은 한데 어울려 역사의 한 시대를 이룬다.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피해’의 기억을 한·중·일이 공유하려는 노력이다. 서로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이해·성찰해 ‘국가간의 증오’를 넘어서자는 제안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피맺힌 증언에도 “증거없다” 일 우익 툭하면 ‘날조’ 만행 ● 55년 1차 교과서 파동
원폭 피해·난징 가해 쏙 빼 ● 70년대 2차 파동
난징 넣었다가 수정 시도 ● 90녀대 중반 3차 파동
우익 “난징은 거짓말”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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