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랴쇼몽’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각색해 만든 같은 이름의 영화. 소설 원작은 주인공인 하인과 노파가 저지르는 악행의 악순환을 통해‘악의 보편성’을 잘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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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북한·이라크 등을 ‘악의 축’ 으로 규정하고
반대세력은 이들과 ‘성전’ 을 벌이고 있다
선과 악은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수자를 중심에 놓고 윤리의 문제에 접근할 때
악과 거짓의 악순환이 창궐하는 우리 시대에
윤리적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은 악의 문제를 인상 깊게 제시하고 있다. 주인공인 하인은 해고되어 갈 곳을 잃고 떠돈다. 하인은 도둑이 되려고 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여기에는 힘겨운 삶의 상황과 그 해결책으로서의 범죄라는 두 요소가 존재한다. 힘겨운 삶은 현실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도덕법칙이다. 힘겨운 삶은 도덕법칙의 파기를 향해 주인공을 유혹한다. ‘도덕법칙’이란 무엇인가? 칸트가 강조했듯이, 도덕법칙은 개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념(情念)들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보편성을 생명으로 한다. 도덕법칙은 개인의 성향이나 상황, 이해관계 등을 초월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도덕법칙은 각 개인의 마음에 내면화되어 ‘양심’을 형성한다. 따라서 도덕법칙을 어기고 악한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주인공인 하인은 힘겨운 현실과 도덕법칙 사이에서 망설인다. ‘라쇼몽’ 악행의 악순환 묘사 도덕법칙의 생명은 보편성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때 도덕법칙은 그 권위를 상실하고 결국 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눈치, 곧 상호 감시로 전락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남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도덕법칙이 패러디의 상태로 전락한 경우라 하겠다. 도덕법칙이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억압적 법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 법칙을 어기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자기 역시 마음 놓고 도덕법칙에 반(反)하는 쾌락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법칙이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는 곧 의(義)가 구현되어 있을 때이다. 하인은 라쇼몽에 갔을 때 한 노파가 사람의 주검에서 머리카락을 뜯고 있는 것을 본다. 그 때 그는 그 노파에게 강렬한 ‘의분(義憤)’을 느낀다. 하인이 노파에게 느끼는 의분은 그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도덕법칙에 근거한다. ‘나쁜 짓’에 대한 의분은 그 나쁜 짓이 나에게 벌어질 수도 있음을 전제할 때 더 커진다. 도덕법칙은 상호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도덕법칙의 생명이 보편성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점따라 바뀌는 서로의 진술 힘겨운 현실이 벌어질 때 악의 창궐이 발생한다. <라쇼몽>의 배경은 매우 참혹한 상황이다. 수도는 황폐화되고 그래서 라쇼몽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주검을 버리는 장소로 전락했다. “귀뚜라미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삭막한 풍경이다.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당연시하던 도덕법칙은 극한의 현실이 도래할 때 시험에 부쳐진다. 도덕법칙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삶에서의 시련의 강도가 약할 때이다. 시련의 강도가 약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우 도덕적인 존재인 척하지만, 정말 실상이 드러나는 것은 삶이 극한적인 상황에 처해졌을 때이다. 도덕법칙이 진정 빛을 발해야 할 때는 이때이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흘러간다. 하인은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노파에게 의분을 느꼈고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는 도덕법칙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노파는 살기 위해 악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노파는 죽은 여자의 악행을 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죽은 여자는 평소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고, 따라서 이미 죽은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뜯어 판다고 한들 그게 왜 나쁘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악의 일반화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악을 저질렀을 경우 거기에 대해서 악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의 상호성이 아니라 악의 상호성이다. 다시 밀해 이것은 도덕법칙의 반면(反面), 도덕법칙과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악의 보편성이다. 그래서 다시 반전이 발생한다. 하인은 죽은 여자의 악행이 노파의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노파의 악행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그 자신이 노파에게 악행을 가한다. 이렇게 악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악은 순환하게 되며 해결의 고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인은 다시 강도짓을 하기 위해 교토로 발걸음을 옮긴다. %%990002%%
아쿠타가와가 묘사한 악은 상대적 악이다. 그렇기에 보편적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논리는 선의 보편성이 아니라 악의 보편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악은 보편적이고 순환적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 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행위이다. 그것을 아쿠타가와는 ‘사랑(愛)’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사랑은 늘 좌절된다. 에고이즘을 떠난 절대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계속 순환한다. 길은 있지만 가기가 힘들다. 아쿠타가와에게 악의 상호성은 인식론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또 다른 단편소설 <덤불 속>은 관점들의 상대주의가 어떻게 악에 의해 지배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 인식론적 상대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여기에서 악은 거의 절대적 악에 근접한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재판관의 심문이 벌어진다. 나무꾼은 살인 사건을 증언한다. 그 다음 나그네 스님이 증언한다. 그는 살인 사건이 있던 전날 피해자를 만났었다. 피해자인 사무라이는 부인과 칼, 활, 화살을 가지고서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 두 가지 증언은 비교적 투명하다. 바꿔 말하면 인식론적 장막이 아직 드리워지기 전이다. 적어도 일정 부분까지는 관점들의 교차가 가능하다. 나졸이 도적을 붙잡아 왔는데 그는 다조마루라는 유명한 도적이다. 그가 유달리 ‘색’을 밝힌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전개에 중요한 복선으로 깔린다. 평범한 이야기라면 다조마루가 사무라이를 죽였다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조마루, 여인, 사무라이의 어긋나는 증언이 전개된다. 1) 다조마루:나는 사내를 유인해서 나무에 묶었으며, 그가 보는 앞에서 부인을 겁탈했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자기를 자살하게 해주거나 아니면 자기 남편을 죽여 달라고 말했다. 나는 사무라이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밧줄을 풀어주었고 정정당당하게 결투해 승리했다. 그 사이에 여인은 사라졌다. 2) 여인: 다조마루에게 겁탈당했다. 나는 남편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남편의 눈빛에서 형언할 길 없이 차가운 경멸을 보았다. 나는 남편에게 같이 죽자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노려보기만 했다. 나는 남편을 죽였고 곧 따라죽으려 했으나 정신을 잃었다. 3) 죽은 사무라이(무당을 통해 이야기함): 겁탈당한 아내는 도적의 말에 넘어가 그를 따라가려 했다. 아내는 도둑과 함께 떠나면서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했다. 도둑은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팽개쳤다. 도적은 나를 쳐다봤고 아내는 도망갔다. 도적은 나를 반쯤 풀어주었고, 도적이 가고 나서 밧줄을 완전히 푼 나는 떨어져 있던 단도로 내 가슴을 찔렀다.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누군가가 내 몸에서 단도를 뽑았다. 소수자 처지서 선악 구별해야 <라쇼몽>이 악의 보편성을 날카롭게 서술했다면, <덤불 속>은 거짓의 보편성을 처절할 정도로 인상 깊게 묘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악과 거짓의 보편성이 창궐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조지 부시 정권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들고 나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공격을 가하고 있다. 반대 세력은 이런 정권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해 ‘성전(聖戰)’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정말 불행한 것은 이런 악의 보편성이 <라쇼몽>이 묘사한 참혹한 현실에서가 아니라 생산이 소비를 앞질러 가는 시대에 창궐하고 있다는 점이다. %%990003%%그리고 이런 악의 보편성은 대중매체들을 통한 거짓의 보편성을 통해서 보완되고 있다. 선과 악은 보편적 지평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선과 악은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수자(마이너리티)를 중심에 놓고서 윤리의 문제에 접근할 때, 허구적/추상적 보편성이 악과 거짓의 악순환이 창궐하는 우리 시대에 윤리적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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