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토박이 여신 자청비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간 강인한 여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제주 해녀의 억척스런 삶과도 닮았다. 위는 화가 강요배가 그린 <여신 자청비>(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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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시험과 시련을 넘어
천상의 문도령과 혼인
지상에 오곡을 뿌린 여신이라 이런 상황 설정은 물론 여성을 결여된 존재로 인식하는 남성중심적 문화 탓이지만 <세경본풀이>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딸이면 어떠냐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딸의 작명 사연에 잘 드러난다. 김진국 대감은 묻는다. “부인님아, 아기씨 이름은 자청하여 태어났으므로 자청비(自請妃)로 이름 석 자 짓는 게 어떠합니까?”(안사인 창본) 스스로 청해 태어났다는 이 아버지의 발언 속에 이미 <세경본풀이>의 여성 인식과 자청비의 능동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자청비가 얼마나 씩씩하게 자신의 운명을 운전해 나갔는가 하는 것, 그리고 그런 운전하기와 세경신되기의 관계다. 먼저 자청비의 운명을 시험하는 존재는 하늘 옥황의 문도령이고, 문도령으로 표상되는 남성지배 사회의 통념들이다. 자청비는 주천강 연못에 빨래하러 갔다가 마침 지상의 거무 선생한테 글공부를 하러온 문도령과 마주친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는 물 한 바가지. 너무도 익숙한 고전적 첫 만남이다. 다르다면 하늘 남자와 땅 여자의 신화적 만남이라는 것. 이 첫 만남에서부터 자청비의 능동성은 발현된다.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글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 당연히 ‘계집의 글공부’를 막아서는 부모에게 글 모르면 제삿날 지방도 못쓴다고 반박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자청비는 자청도령으로 변장하고 글공부를 하러 간다. 이 대목 역시 남성지배문화의 소산이다. 그러나 자청비는 온전히 남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 글공부를 하는 도중 자청도령은 끊임없이 정체성을 의심받는다. 글방 선생은 자청도령의 젖을 만지고 옷을 벗기고, 문도령과 달리기·씨름·오줌멀리싸기 시합을 하게 하는 등(강을생 창본) 시험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청비는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한다. 말하자면 남성들의 횡포에 맞서 남성들의 시험을 통과한다. 이 통과의례의 최종 관문은 이야기의 후반에 나오는 하늘나라 시아버지의 시험이다. ‘내 며느리 될 사람은 구덩이에 숯불을 피워놓고, 불 위에 칼날이 선 다리를 놓고 건너가야 자격이 있다’는 것. 자청비는 물론 이 시험에도 합격한다.
여기서 잠시 남녀의 결혼에 의해 지상에 곡물의 종자가 생겨나는 곡물기원신화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세경본풀이> 역시 문도령과 자청비가 결혼한 뒤 자청비가 천상에서 오곡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수신화와 연결돼 있는 오래된 곡물기원신화를 보면 시험을 당하는 것은 남성이다. 여전히 모계사회 형태를 간직하고 있어 문화인류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윈난의 모소족 신화를 보면, 홍수 뒤 유일하게 생존한 남성은 짝을 찾아 천상으로 올라간다. 이 남자는 하늘나라 공주와 결혼하게 위해 며칠 만에 산을 개간하여 메밀을 뿌리고 수확을 하라는 등 갖은 시험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서야 지상의 남자는 천상의 공주를 데리고 내려올 수 있었다. 이때 농사를 지을 종자를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공주였다. 이런 오래된 곡물기원신화의 처지에서 보면 <세경본풀이>에는 남녀의 관계가 역전돼 있다. 오곡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은 여전히 여성이지만 자청비는 땅에 속한 존재고 시험을 당해야 하는 존재다. 이런 관계의 역전은 아무래도 남성중심문화의 결과일 것이다. 대개의 판본에서 자청비가 상 세경신이 아니라 중 세경신으로 좌정한 것도 이런 탓이다. 자신을 학대한 수렵신과
독살당한 남편을 살려내니
제주 어멍·할멍의 능동적 삶은
자청비의 조화가 아니런가 자청비의 운명을 가로막는 다음 남자는 정수남이다. 정수남은 자청비와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자청비네 하인이다. 문도령이 서수왕 따님아기에게 장가가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첫날밤을 겨우 보낸 다음 날 머리빗 반쪽을 징표로 남기고 가버린 뒤, 하루는 이를 잡고 있는 정수남에게 쏘아붙인다. “더럽고 누추하게 두툽상어처럼 먹어 놓고, 일도 없어 바지허리를 뒤집어 놓고 이 사냥만 하느냐?”(안사인 창본) 남의 머슴들처럼 산에 가서 나무라도 좀 해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홉 마리 소와 말을 끌고 산에 간 정수남은 소와 말을 매어두고 며칠을 늘어지게 자다 일어나 죽어가는 우마를 구어 먹어 버린다. 그리고는 돌아와 문도령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단풍놀이 온 것을 구경하다가 잃어버렸다, 문도령이 모레 다시 올 테니 만나러 가자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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